장동혁 서울중앙지법 판사가 진로를 바꾼 이유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현수 기자>

[시사위크=정계성 기자] 장동혁 판사(서울중앙지법)를 만난 것은 지난해 기자로서 국회를 출입하던 시기다. 당시 장동혁 판사는 국회파견판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판사라는 공직에 있음에도 딱딱하지 않고 유연한 자세와 소통능력, 또 주위를 집중시키는 말솜씨로 기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적지 않았었다.

업무적으로도 빼어난 능력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되는데, 이는 장 판사의 특이한 이력 때문에 가능했다. 1988년 서울대학교 사범대 불어교육과에 입학한 장 판사는 재학 중이던 1991년 행정고시에 합격해 교육공무원으로 7년 가까이 현장에 있었다. 그러다 돌연 마음을 바꿔 늦깎이로 사법시험에 도전해 2001년 합격, 판사로 영역을 넓혔다. 여기에 최근 2년 간 국회 파견판사를 거치면서 행정·사법에 이어 입법부도 경험한 셈이다.

그렇다고 장 판사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엘리트 코스만을 밟은 인물은 아니다. 사실 충남보령의 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변변한 집안 도움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고등학교 때는 통학이 어려워 교실에서 잠을 청하는 날이 다반사였다. 불이 다 꺼진 교실에 혼자 촛불을 켜 놓고 있을 때면 서러운 감정이 들기도 했다. 그 시절을 회상하는 장 판사는 눈은 촉촉이 젖어들었다.

그래서일까. 장 판사는 교육과 청소년 문제에 특히 관심이 많다. 사범대학과 교육부 공무원, 대전가정법원을 거치면서 청소년 문제를 직접 다뤄본 경험이 밑바탕이 됐다. 먼저 건강한 가정을 만들 수 있는 환경조성, 그리고 청소년이 가정에서 느끼는 결핍을 채워줄 제도적 장치가 중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물론 후배들에 대한 애착도 남다르다.

<시사위크>는 국회 파견판사 2년을 마치고 다시 사법부로 복귀,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장동혁 판사를 만나 그의 경험과 식견, 주요현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장 판사와의 인터뷰는 2월 28일 서초동 대법원 인근의 북카페에서 이뤄졌다. 다음은 그와의 1문 1답이다.

- 주변에서 “판사 같지 않다”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것 같은데, 외모도 그렇고 말도 딱딱하지 않다.
(웃음) “칭찬으로 받아들이겠다. 저를 만나는 많은 분들이 두 가지 사실에 놀라는 것 같다. 우선은 제가 판사라는 사실에 놀라고, 다음으로 시골 출신이라는 것에도 의외로 많이 놀라시더라.” 

장동혁 판사는 행정부와 사법부를 모두 경험한 것이 큰 자산이 됐다고 말한다. <김현수 기자>

- 시골이 고향인가.
“충남 보령에 있는 웅천이라는 시골 마을이다. 어머님이 살고 계신데 지금도 버스를 타려면 30분 정도는 걸어야 하는 곳이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30분 정도 걸어서 학교에 다녔고, 고등학교(대천고등학교)는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 때는 학교에 가는 버스표를 사기 힘들 때도 종종 있었다.”

- 학창시절 형편이 어려웠다고 들었다. 사연이 있는가.
“원래 위로 형님 두 분과 누님, 이렇게 세 분 계셨다. 그런데 지금은 형님 한 분 뿐이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우리 할아버지가 매일 술을 드셨던 것 같다. 그것이 늘 집안의 평화를 깨뜨렸다. 당연히 어머니도 힘드셨겠지만 지켜보는 우리도 힘들었다. 그런 환경 때문인지 모르지만 큰 형님은 초등학교만 나오고 직장을 다녔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자살을 시도했다가 그 후유증으로 돌아가셨다. 방과 후 집에 와서 밝게 웃었던 기억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아픈 기억들도 많은데 가족들 이야기를 이 자리에서 다 할 수는 없지만 정말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 형편이 어려웠다고 했는데 공부는 어떻게 했나.
“서울대를 간다는 것은 처음에는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때 서울대에 진학한 선배가 (형편이 어려워도) 생활이 가능하다고 하더라. 그 때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학교에 기숙사가 없어서 교실에서 자면서 학력고사를 준비했다. 교실에서 밤에 혼자 공부하는데 수위 아저씨가 불을 끄고 가면 초를 켜놓고 몰래 공부를 했었다. 겨울이 되면 교실이 많이 추웠는데 서럽기도 하더라. 그런데도 그 때는 집에 가는 것보다 학교에 있는 게 더 마음 편했다.”

- 기억나는 친구가 있다면.
“고등학교 친구 중에 김윤호라는 친구가 있었다. 1등으로 입학해 1등으로 졸업한 친구다. 나와 같이 서울대에 입학했고, 행정고시에 합격해 해양수산부에서 근무했다. 그런데 몇 해 전에 페루에서 보트 전복사고로 운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 사고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어디에선가 큰 일을 했을지도 모르는 친구다.

학창시절 힘들 때 그 친구를 보면서 공부를 할 수 있던 것 같다. 사람을 하루하루 움직이는 것은 대단한 비전이나 꿈이 아니다. 대한민국을 이끌 지도자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수학문제를 푸는 게 아니지 않나. 경쟁하는 친구가 공부를 하는데 잠을 잘 수 없었다. 이런 선의의 경쟁심, 때로는 사소한 인간적 욕심이 하루하루를 움직이는 동력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친구의 죽음이 매우 안타깝고, 이 기회를 빌려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 어렵게 사범대에 입학해 교육부 공직에 올랐다. 그런데 다시 사법시험을 준비한 이유는.
“어릴 적부터 꿈이 판사였다. 법과대학 진학하지 못하고 사범대학에 입학하다 보니 행정고시 교육직렬에 응시해 합격하게 됐다. 교육부에 근무하면서도 마음속에 묻어 두었던 판사에 대한 꿈은 식지 않았다. 결정적인 계기는 고등학교 동기가 뒤늦게 공부를 시작해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판사가 된 사건이었다. 그 친구 덕분에 큰 결심을 할 수 있었다. 앞서 말했지만 큰 비전이나 꿈이 사람의 인생을 바꾸기도 하지만, 때로는 ‘선의의 경쟁심’이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 후회하지는 않는가. 계속 교육부 공직에 있었다면 굉장히 높은 직위에 올랐을 수도 있는데.
“주말에도 판결문을 쓸 때는 가끔 후회가 된다.(웃음) 농담이고,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또 판사 생활을 하면서도 행정부 공무원 생활을 했던 게 헛되지 않고 많은 도움이 됐다. 그런 경험들이 계기가 돼 법원 기획판사 공보판사 국회파견도 할 수 있었다.

앞으로 법관 생활을 계속 할 지 다른 선택을 할 지 모르지만 공무원과 법관으로서의 경험, 나아가 2년 국회파견 경험, 그 모든 것들이 시너지 효과를 내 큰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처음에는 인생을 돌아왔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처음부터 판사를 했더라면 하는 생각도 했다. 속도가 중요한 게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은 방향이 정해진 게 아니라 내가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모든 경험들이 합쳐져서 새 방향을 설정할 때 더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이제는 진짜 후회하지 않는다.”

늦깍이 판사 생활에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장 판사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 법관으로서는 흔치 않게 국회를 경험했는데 소회가 있다면.
“처음 인사발령 때는 당혹스러웠고, 국회에서의 생활이 힘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국회에서 2년 동안 근무하면서 ‘정치’를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는 경험을 가진 데 대해 감사한다. 특히 밖에서 바라볼 때와 달리 국회가 정말 열심히 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국회가 파행되어 잠시 멈추어 있을 때조차도 그것이 불필요한 악이 아니라 의회 정치의 본질상 또 다른 측면에서의 생산적인 과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엇보다 예측 가능성을 중시하는 법원에 있을 때와 달리 한 치 앞을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국회가 신선하게 다가올 때가 많았다.”

- 제3자적 입장에서 문제점도 많이 보였을 것 같다.
“의회정치는 기본적으로 서로 다른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토론을 하고 상대방을 설득하고 그 과정에서 합의안을 도출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국회는 그런 면이 조금 부족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상대가 제안한 것은 일단 반대하거나 문제가 있는 법안은 논의조차 되지 않는 것이 대표적인 문제다. 그것 또한 정치적 측면에서 의미가 있을 수 있지만 너무 심할 때는 의회정치의 본질과 다르지 않은가 하는 아쉬움이 있다. 결국은 구성원이 바뀌더라도 의회정치가 유지돼야할 시스템이 필요한데, 콕 찍어서 대안을 내놓을 순 없지만 국회법을 개정하는 것도 그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 이 질문을 안하고 넘어갈 수 없을 것 같다. 최순실 국정농단 관련, 이재용 부회장 판결과 신동빈 회장 판결이 엇갈린다. 국민 눈높이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데 개인적인 의견이 있다면. 또 이에 대한 재판부 내 분위기는 어떠한가.
“현직 법관에게 진행되는 재판에 관한 질문이 가장 힘들다.(웃음) 국회로 떠나 있는 동안 이뤄진 판결이기 때문에 구체적 내용을 알지 못하고 직접 기록을 본 것도 아니기 때문에 판결에 대한 평가가 어렵다.

다만 사법제도라는 것은 우리가 사회적인 합의에 따라 분쟁이나 문제를 해결하도록 만든 제도다. 물론 사법부가 신이 아닌 이상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세 번 재판을 하도록 하고, 결론이 나면 비록 그 결론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존중하고 따르기로 사회적 합의를 한 것이다. 법원의 결정에 대해 비판은 가능하고 또 비판여론이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너무 많은 비판이 가해져 법원 판결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상황이 오면 사회적으로 더 큰 비용이 발생할 위험이 있다.”

이재용 판결 등 곤란한 질문에도 장 판사는 웃음과 함께 답변을 피하지 않았다. <김현수 기자>

- 판사로서 맡은 사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재판이 있다면.
“이 질문도 자주 받지만 난감한 질문 중 하나다.(웃음) 금액은 아주 소액의 사건이었다. 시골 마을 인근에 혐오시설이 들어서면서 받은 지원금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마을 주민들과 분쟁이 생겨 몇 년째 민사소송과 형사상 고소·고발을 반복하고 있는 할머니였는데, 그 과정에서 무고죄로 실형까지 살고 나오셨다.

무고죄로 실형을 살고 나온 이후에도 비슷한 내용으로 다시 민사소송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할머니 마음속에 무언가 한이 맺힌 것 같아 그 사건만 오후 시간 전체를 심리하기로 하고 세 번의 심리를 반복했다. 그 할머니가 하시고 싶은 말씀을 다 하시도록 시간을 드리자는 취지였다. 법리적으로 그 할머니가 다시 패소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할머니는 감사하다는 말씀을 남기시고 법정을 떠나셨다. 지금도 그 사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 인생의 롤모델이나, 닮고 싶은 유명인사가 있다면.
“최근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 대한 책과 그의 연설문을 읽어본 적이 있다. 오바마의 연설을 보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읽어내는 능력이 있구나 하고 깨닫는다. 또 오바마가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소통하려는 모습이 크게 와 닿았다. 이 두 가지 측면에서 오바마가 롤모델이다.”

- 주변에서 정치를 해보라는 권유를 받았을 것 같은데, 현실정치에 대한 생각은.
“과분한 말씀이다. 행정부에서도 근무하고 판사이면서 2년 동안 국회에서 근무한 경력 때문에 그런 말씀들을 하시는 것이 아닌가 싶다. 현실정치에 대한 생각을 말씀드리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 같다. 다만 막스 베버가 말한 것처럼 ‘정치란 열정과 균형감각을 가지고 단단한 널빤지를 강하게 그리고 서서히 뚫는 작업이다’ 그리고 거기에 책임감이 더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 청년들이나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가끔씩 시냇물을 건너가는 것에 인생을 비유 해본다. 시냇물을 건너기 위해서는 많은 징검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서울대학교 들어갔을 때 과연 몇 개를 건넌 것일까. 행정고시를 합격한 것은 또 얼마나 건넌 것일까. 나아가 사법시험은? 학창시절 때 좌절하고 대학 때 포기했다면 이만큼 징검다리를 건널 수 있었을까.

혹자는 판사가 됐다고 성공한 인생이라고 한다. 그런데 앞서서 나보다 더 많은 징검다리를 건넌 사람들은 나를 보고 답답해하지 않을까. 새로운 것을 꿈꾸고 도전하면 더 큰 가능성이 열리는데 안주하고 있다고. 목표를 세운다고 다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늘 새로운 꿈과 목표를 세우고 도전하는데 게으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내가 밖에서 이런 얘기 하지 말라고 했는데.(웃음)

‘색깔 있는 삶을 살자’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자신만의 소신과 철학이 그 사람의 경쟁력이라고 믿는다. 실패가 인생의 소금이라면 희망은 공기다. 끊임없는 도전이 우리의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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