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세류성해(細流成海).’ 가는 물줄기가 모여 큰 바다를 이룬다는 뜻이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 작은 힘이 모이면 큰 변화를 일으킨다는 의미와도 맥이 닿아있다. 우리는 이미 지난 촛불혁명을 통해 이를 경험했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꾼 것은 거대 권력도 아니고 정치적인 어젠다도 아니었다. ‘국민주권’을 위해 행동했던 ‘시민들의 힘’이었다. 하지만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 이에 <시사위크>에서는 대한민국 변화를 이끄는 중심, ‘시민운동가’들의 릴레이 인터뷰를 통해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제언을 경청해본다. [편집자주]

지난 17일 서울 마포구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만난 이미경 소장이 인터뷰 전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김경희 기자
지난 17일 서울 마포구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만난 이미경 소장이 인터뷰 전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김경희 기자

[시사위크=조나리 기자] “그 시절 성폭력에 대한 교육은 ‘여자는 몸 간수를 잘해야 한다.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절대 강간은 안 당한다’는 식이었지요. 1985년 대학원 여성학과에 입학하면서 처음으로 성폭력 문제를 학문적으로 접근했어요. 성폭력은 개인의 불운한 사건이 아니라 여성의 성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가부장 제도의 산물이라는 것을,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라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됐습니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석사 논문을 마치고 대학에서 여성학을 강의하던 중 장필화 이화여자대학교 여성학과 명예교수의 제안으로 성폭력상담소 창립 멤버로 뛰어들었다. 당시만 해도 성폭력 문제만을 전담하는 단체는 없었기에 더욱 고무적으로 준비에 나섰다. “솔직히 말하면, 이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 얼마나 할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어요.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전화가 쏟아졌죠.”

이미경 소장이 처음으로 공동대응팀을 꾸려 지원활동에 나섰던 1991년 '김OO 사건'에 대해 회상하고 있다. /김경희 기자
이미경 소장이 처음으로 공동대응팀을 꾸려 지원활동에 나섰던 1991년 '김OO 사건'에 대해 회상하고 있다. /김경희 기자

1991년부터 지금까지 8만2,000여건 사례 접수와 피해자들을 지원해 온 한국성폭력상담소. 그간 우리 사회는 얼마나 변화했을까. 2018년 1월 29일 서지현 검사는 JTBC <뉴스룸>에 출연해 8년 전 성추행 피해 사실을 고백했다. “성폭력 피해자분들께 ‘결코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것을 얘기해 주고 싶었습니다. 제가 그것을 깨닫기까지 8년이 걸렸습니다.”라고.

한국성폭력상담소가 개소한 즈음, 한국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 연달아 터졌다. 1991년 1월 30일, 한 여성이 9살 때 자신을 성폭행했던 ‘동네 아저씨’를 20년이 지난 후 찾아가 살해했다. 이 소장은 ‘나는 사람을 죽인 게 아니라 짐승을 죽였다’라던 그의 절규가 지금도 선명하다고 말했다.

다음해인 1992년에도 13년간 의붓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한 김모 씨가 자신의 남자친구와 의붓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전국의 여성사회단체와 22명의 무료 변호인단을 조직해 대응했다. 이 소장은 “당시는 법적으로 직계존속을 고소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면서 “상담소도 없고, 고소도 못하고, 누구에게 알리지도 못했던 피해자는 이후 살인자로 법정에 세워졌다”고 말했다.

이어 “많은 시민들이 무죄 석방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면서 “특히 그 과정에서 피해자에 대한 공격도 끊이지 않았다. ‘너도 즐기지 않았냐’는 비난과 피해자를 의심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고 회상했다. 두 사건은 이 소장에게 조직적인 힘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한 동시에 지금까지도 반성폭력 운동을 할 수 있게 한 계기가 됐다.

“많은 사람들이 ‘왜 우리나라에서 미투가 2018년에 시작됐나’ 질문합니다. 그러나 미투는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일본군 성노예 고발 등이 그 사례죠. 우리는 그것을 미투의 시작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다만 과거에는 ‘피해자들의 말하기’에 머물렀다면 지금은 시민들이 피해자들의 고발을 듣는 사회로 바뀌고 있다고 생각해요.”

“미투운동, 올해 시작? 피해자들 고발 늘 있었어”
“많은 제도들, 제대로 이행되고 있는지가 중요”

이 소장은 한국에서의 미투운동의 원인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성범죄를 당하면 고소를 하고, 국가가 가해자를 처벌하면 된다. 이게 상식이고 법이다. 그런데 그게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가”라며 “최근 미투운동을 보면 대부분 공소시효가 지난 일들을 고발하고 있는데, 이는 법이 나한테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피해자 스스로 자신이 피해를 당했다고 말하는 것 밖에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많은 피해자들이 당시 격렬히 저항하지 못하고, 바로 신고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책감에 시달린다”면서 “상담 때마다 피해자들에게 담아두지 말고,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고, 치유를 향한 노력을 하라고 조언한다. 미투운동 역시 더 이상 참고 넘어가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이미정 소장은 “가해자에게 왜 때렸냐고 묻지 않고, 피해자에게 왜 맞고 있었냐고 묻는 ‘피해자 재판’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경희 기자
이미경 소장은 “가해자에게 왜 때렸냐고 묻지 않고, 피해자에게 왜 맞고 있었냐고 묻는 ‘피해자 재판’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경희 기자

수사 기관에 의한 2차 피해 역시 고질적인 문제다. 지난 3월 성폭력 피해를 호소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단역배우 자매 자살사건에 대한 진상조사 전담팀이 꾸려졌다. 수사팀은 자매가 자살하게 된 경위와 수사 과정의 부적절한 처리 여부 등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경찰은 자매 중 성폭력 피해를 주장하는 언니 A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가해자를 격리하지 않고, 피해 상황을 묘사할 것을 요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2004년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에서도 경찰은 피해자에게 ‘밀양 물 다 흐려놓았다’는 비난성 발언을 해 논란이 됐다.

이 소장에게 밀양 집단 성폭행 사건은 ‘아픈 손가락’으로 남아 있다. 이 소장은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고발하고,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일부 승소 판결을 받기도 했다”면서 “하지만 피해자 입장에서 보면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당시만 해도 피해자를 위한 임시거처 지원도, 건강한 삶을 회복하기 위한 지원도 전무했다”며 씁쓸해했다.

이 소장은 검찰과 법원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지적했다. 특히 피해자들이 어떤 경찰, 어떤 검사, 어떤 판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삶이 좌우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는 것. 그는 “올해 이윤택, 안희정 사건의 1심 결과만 봐도, 정말 상이하지 않은가”라며 “가해자에게 왜 때렸냐고 묻지 않고, 피해자에게 왜 맞고 있었냐고 묻는 ‘피해자 재판’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윤택 연출과 안희정 전 지사는 혐의는 다르지만, 두 사건 모두 피해자들의 진술이 유·무죄를 가르는 주요한 기준이었다. 이윤택 연출에게 징역 6년을 선고한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0부는 “피해자들이 자신의 신변까지 공개하면서 폭로를 하고 피고인 역시 기자회견을 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면서 “이러한 과정을 보면 피해자들이 자신들의 피해를 늦게나마 밝힌 것으로 보이고, 고소의 진정성을 의심할 만한 사정은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반면 안 전 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한 서울서부지법 형사합의 11부는 “안 전 지사와 김지은 씨 사이에 위력 관계는 존재하나, 위력을 행사했다고 볼 증거가 없다”면서 김씨 진술도 신빙성에 의문이 있다고 밝혔다.

다만 이 소장은 “여성 경찰, 여성 검사, 여성 판사라고 꼭 성범죄 피해자들을 배려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오히려 그런 편견 때문에 여성 검사나 판사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원하지 않는 성폭력 전담 부서로 발령되기도 한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스스로 인권감수성을 키우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우리 사회, 분명 변하고 있어... 희망을 믿어”
“스스로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실천이 변화 이끌어”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성범죄와 관련한 각종 특별법이 제정되고, 기존 법률도 개정을 거치며 조금씩 개선돼 왔다. 그러나 폭행 또는 협박을 전제로 하고 있는 형법상 성폭행 개념은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역고소를 당하거나 사생활 비방 등의 ‘2차 가해’가 두려워 신고조차 못하는 피해자들의 처지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미경 소장은 사회의 변화는 어느날 갑자기 누군가가 나타나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고, 개개인의 인식과 일상에서의 변화들이 이끄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경희 기가
이미경 소장은 사회의 변화는 어느날 갑자기 누군가가 나타나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고, 개개인의 인식과 일상에서의 변화들이 이끄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경희 기가

물론 여러 변화들도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최근 한 여성 연예인을 상대로 한 ‘동영상 협 박’(리벤지 포르노) 논란은 피해 연예인이 직접 피해 사실을 밝히면서 드러났다. 피해자이면서 도 숨기기 급급하던 과거와 달리 오히려 피해 사실을 공개하고 적극적으로 보호를 요청하고 있는 것. 여기에 응원을 보내는 여론도 변화된 모습이다. 그럼에도 직접 듣고 싶었던 것일까. 지난 30년간 반성폭력 운동을 통해 주요 사건들을 목도해왔을 그에게 마지막 질문을 했다. “우리는 분명 진전하고 있나요?”

이미경 소장은 희망적인 답변을 내놨다.
 
“사회는 분명 변화한다는 희망을 믿어요. 실제로 성폭력에 대한 인식이나 구조, 제도에도 엄 청난 변화가 있었고요. 지금의 여성들 또한 ‘더 이상 과거의 여성은 없다’고 외치고 있죠. 이 같은 변화는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가 나타나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고, 개개인의 인식과 일 상에서의 변화들이 이끄는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피해자를 의심하지 않았나. 나는 방관자가 아니었나. 나는 누군가의 인권을 침해한 적은 없는가’라고요.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성 찰, 그리고 작은 실천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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