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오후 서울 서초동 법무법인 해마루 사무실에서 만난 김세은 변호사. 김 변호사는 “(사법농단)특별조사단이 공개한 자료에 우리 사건번호를 확인했을 때 참담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면서 당시 심정을 떠올렸다. /김경희 기자
지난 6일 오후 서울 서초동 법무법인 해마루 사무실에서 만난 김세은 변호사. 김 변호사는 “(사법농단)특별조사단이 공개한 자료에 우리 사건번호를 확인했을 때 참담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면서 당시 심정을 떠올렸다. /사진=김경희 기자

[시사위크=조나리 기자]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대리했던 김세은(법무법인 해마루) 변호사는 지난해 5월 재판에 합류했다. 앞서 사건을 맡았던 변호인들은 물론 피해자들을 지원해온 시민단체까지 많은 이들의 노력이 기록돼 있었다. 행여 누가 될까 더 많이 공부하고 자료를 뒤졌다던 김 변호사는 대법원 판결에 대해 “다행스러웠다”고 말했다. 사법농단 의혹이 제기됐을 당시 피해자들이 느꼈던 상실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6일 <시사위크>와 만난 김세은 변호사는 “(사법농단)특별조사단이 공개한 자료에 우리 사건번호가 있더라. 그걸 확인했을 때 참담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면서 “이는 승소 판결과는 별개의 문제다. 승소했다고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특히 김 변호사는 앞으로 진행될 절차는 정부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반발하는 일본과 대립이 아닌 대화로 문제를 풀어갈 주체는 사실상 정부이기 때문이다.

◇ 13년8개월이 지나서야 끝난 재판

지난 10월 30일 일제강점기 시절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일본 기업이 배상을 해야 한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단이 나왔다. 2005년 2월 처음 소송이 제기된 지 13년 8개월이 지나서야 끝을 맺은 것. 이 기간 이춘식(94) 씨를 포함한 소송 당사자 4명 중 3명이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은 ‘양승태 법원행정처’가 당시 청와대와의 교감을 통해 재판을 고의로 지연시켰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원고들은 1941~1943년 신일본제철의 전신인 일본제철에 강제징용 돼 노역에 시달렸으나 임금을 받지 못했다. 1945년 해방이 돼서야 고향에 돌아온 피해자들은 1997년 일본 오사카지방재판소에 손해배상과 임금청구 소송을 냈지만 패소, 2003년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확정됐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2005년 국내 법원에 같은 내용의 소송을 제기했다. 그해 처음으로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문서가 공개되면서 개인의 배상청구 권리가 살아있다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김 변호사는 “이 사건 피해자들은 전쟁범죄에 대한 배상을 요구해오시다 계속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국 사법적인 해결로 나아간 사안”이라며 “역사도 오래됐고 많은 선배 변호사님들이 지원을 해주셨기 때문에 더 많이 공부했었다. 청구권협정은 물론 역사적 사건, 어르신들의 삶 역시 제대로 알아야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만큼 무거운 사건이고, 아픔이 있는 사건인데 특별조사단 보고서를 보고 정말 황당하고 화가 났었다”면서 “내용을 알면 알수록, 자료들이 더 공개되고 언론에서 보도가 연이어 나올수록 참담함은 더 커졌다. 이춘식 할아버지께서도 많이 힘들어하셨다”고 전했다.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 씨가 지난 10월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일제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신일철주금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재상고심 판결에 참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뉴시스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 씨가 지난 10월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일제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신일철주금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재상고심 판결에 참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뉴시스

◇ “소송보다 중요한 것은 한일 정부의 대화 노력”

선고 당일 일본은 매우 즉각적이고 격앙된 반응을 내놨다. 이 같은 기조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 6일 일본 정부 대변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한일 국교정상화의 법적 기반을 뒤집는 것으로 매우 유감”이라며 “한국 정부가 적절한 대응을 강구하지 않는다면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 등 모든 대안을 검토하겠다”고 압박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김 변호사는 우리 정부의 확고한 입장 표명 및 대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불법행위 책임을 묻고 있는데, 불법행위가 전제되지 않은 청구권협정이 체결됐고, 그렇다면 개인의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청구권은 살아있다고 보는 게 맞다”면서 “한국 대법원이 바른 판단을 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제 정부가 나서서 대화의 창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피력했다.

실제로 대법원 선고 이후 우리 정부가 일본과의 역사적 문제에 대해 소극적인 대응으로 일관해왔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특히 일본 기업이 중국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공식사과와 배상을 했던 사례들이 재조명 받으면서 정부를 향한 비판이 더욱 거세지고 있다. 중국 피해자들 역시 일본 법원에서 패소 판결을 받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중국 정부와 언론의 강경한 태도가 일본 정부 및 기업의 태도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는 게 지배적인 평가다.

김 변호사는 “일본이 실제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정부가 동의하지 않으면 소송이 개시되지 않는 만큼, 각국 정부가 대화를 통해 해결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며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피해자들이 모두 개별적으로 소송을 제기해야 한다는 것인데, 일본 기업도 부담스러울 수 있다. 충분히 대화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고 했다.

◇ “정부, 더 늦기 전에 피해 진상규명 나서야”

그러나 일본 측이 지금과 같이 우리 정부를 압박하고 있는 상황에선 피해자들이 할 수 있는 조치는 마찬가지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밖엔 없다. 문제는 일본 측이 소멸시효 문제를 제기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민법상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권은 피해자가 ‘손해를 안 날’로부터 3년 안에 행사하지 않으면 소멸한다.

이 사건과 관련해 여러 법적 해석이 나오고 있다. 우선 대법원의 확정 판결이 나온 지난달 30일부터 손해를 안 날로 해석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대법원이 피해자들의 승소 취지로 파기환송 결정을 내린 2012년 5월을 기준으로 보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이미 2015년 5월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 더 이상 추가 소송을 제기할 수 없게 된다.

이 사건 1심과 2심은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라 청구권이 소멸됐다고 판단했다. 반면 2012년 5월 대법원은 원심을 뒤집고 원고 승소 취지로 사건을 돌려보냈다. 다음해인 2013년 파기환송심을 맡은 서울고법도 대법원 판시에 따라 신일본제철이 각 1억원 씩 배상을 하라고 판시했다. 신일본제철은 즉각 재상고 했고, 그때부터 대법원은 지난달까지 선고를 방치했다. 사법농단을 수사 중인 검찰은 이 사이 법원행정처와 청와대의 교감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 다른 해석도 있다. 사법농단 사건이 재판을 통해 사실로 드러날 경우, 소멸시효가 중단됐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 법원은 청구권을 행사 할 수 없는 객관적인 사정이 인정되면, 그때부터 시효 진행이 멈춘 것으로 판단한다. 특히 그 사유가 국가기관에 의할 경우, 국가기관이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것은 권리남용으로 보고 있다. 이 해석에 따른다면 법원행정처와 청와대와의 교감이 2012년 파기환송 직후부터인지, 2013년 일본 기업의 재상고 이후인지에 따라 시효중단 시점이 특정된다.

김세은 변호사는 “더 늦기 전에 피해자 전수조사와 진상규명, 피해자들의 권리구제를 위한 제도가 마련되길 바란다”며 정부의 역할을 촉구했다. /김경희 기자
김세은 변호사는 “더 늦기 전에 피해자 전수조사와 진상규명, 피해자들의 권리구제를 위한 제도가 마련되길 바란다”며 정부의 역할을 촉구했다. /사진=김경희 기자

이에 대해 김세은 변호사는 “대법원이 재상고 이후 빨리 판단을 내렸더라면 더 많은 피해자들이 소송을 제기했을 것”이라며 “그런데 5년 가까이 재판이 지연되면서 피해자들도 절망적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더욱이 그 과정이 일본 정부와 우리 정부, 사법부 등 강력한 힘에 의해 권리행사가 방해됐다는 사실이 점차 드러나고 있는 만큼 충분히 검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물론 정확한 것은 소멸시효 판단을 따로 받아야 하기 때문에 단정할 수는 없지만 원칙적으로 지난달 30일 전원합의체 판결 후 3년 내 피해자들이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다만 김 변호사는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지금과 같이 개별적으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생존자 조사도 미흡한데다 재판 결과에 따라 실제 일본 기업으로부터 배상을 받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기 때문이다. 이에 김 변호사는 정부가 일본과의 대화에 나서는 것과 동시에 피해자들이 권리구제를 받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안내하는 절차가 진행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김 변호사는 “피해자권리장전에는 중대한 인권침해 피해자들에게 ‘재판에 대한 권리’가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재판을 받는 것을 넘어서 재판을 받기 어려운 분들에게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것도 포함하는 것”이라며 “지금처럼 개별 피해자분들이 개별적으로 변호사를 선임하는 식은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다. 더 늦기 전에 피해자 전수조사와 진상규명, 피해자들의 권리구제를 위한 제도가 마련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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