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hero)를 다룬 이야기는 흥행불패다. 악당과 대적하는 주인공이 고난을 극복하고 정의를 쫓아가는 과정 속에서 대리만족을 얻는다. 여기엔 세상을 향한 일침이 있고, 잠들어있던 인류애를 깨운다. 어쩌면 우린 각박한 현실에서 나를 도와줄 히어로를 기다리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는 멀리 있지 않다. 당장 세상을 바꿀 순 없어도 따뜻한 뉴스로 종종 찾아온다. 목숨을 걸고 이웃을 구한 시민 영웅들이다. 모든 이야기의 결론은 ‘함께 살자’는 것이다. 옳고 그름이나 높고 낮음이 없다. 당신도 누군가의 히어로가 될 수 있다. | 편집자주

장백관 (주)유로자전거나라투어 대표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림을 받았다. 고아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붙었지만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의 의지만큼 강한 게 없다”고 말했다. / (주)유로자전거나라투어 제공
장백관 (주)유로자전거나라투어 대표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림을 받았다. 고아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붙었지만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의 의지만큼 강한 게 없다”고 말했다. / (주)유로자전거나라투어 제공

[시사위크=소미연 기자] 나는 왜 사는가.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끝이 없다. 삶은 결국 그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일지도 모르겠다. 그 과정에서 작은 선의를 보인 행동이 기적을 일굴 때가 있다. 로마에서 만난 한 거지에게 건넨 50센트가 새로운 동기부여가 되고, 필리핀 빈민가에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 기부한 1만 달러가 더 큰 행복으로 돌아오는 식이다. 사업도 번창했다. 18년 전, 홀로 시작했던 일에 현재 약 110명의 직원들이 함께하고 있다. 그래서 깨달았다. 더불어 사는 삶, 나눔을 위한 일을 멈추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토록 찾았던 존재의 이유에 대한 해답이랄까.

◇ 어린 시절 충격 안긴 고아원 선생님의 한마디

장백관 (주)유로자전거나라투어 대표(54)는 “삶의 현장에서 기부를 통한 기적을 직접 경험한 이후 내가 왜 사는가에 대한 명확한 답을 얻었다”고 말했다. 사실 이 답변의 질문은 기부를 시작한 계기나 이유가 아니었다. 누적 기부액에 대한 물음이었다. 그는 선뜻 답하지 않았다. 최근 방영된 JTBC 예능프로그램 ‘뭉쳐야 뜬다2’에서 현지 가이드로 나온 직원의 히스토리를 한참 설명한 뒤에야 “해마다 1억원 이상 기부를 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끝까지 누적 기부액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대신 “수녀님들이 되도록이면 감추라고 하더라”고 귀띔했다.

장백관 대표는 가톨릭 신자다. 그의 불우한 어린 시절이 인연을 맺게 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무렵 부모가 이혼을 했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남겨두고 집을 나갔고, 아버지는 재혼과 동시에 자신의 아들을 길거리에 버렸다. 당시 고아원에서 자택으로 수없이 연락했으나 끝내 아들을 데리러 오지 않았다. 그때 한 선생님이 “네 친부모가 맞느냐”고 물었던 기억은 상처로 남았다. 고아원은 수용소와 다름없었다. 도망을 나와서 길거리를 전전했고, 부랑아 단속반에 붙잡히면 다시 고아원으로 돌아가야 했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준 게 마리아수녀회에서 개원한 ‘서울 소년의 집(현재 서울시 꿈나무 마을)’이었다.

장백관 대표는 35세에 회사를 그만두고 유럽으로 떠나 여행 가이드를 시작했다. 2000년 1인 창업으로 시작해 현재 약 110명의 직원들이 함께 하는 중견 여행사가 됐다. 사훈은 ‘늘 가족처럼’이다. / (주)유로자전거나라투어 제공
장백관 대표는 35세에 회사를 그만두고 유럽으로 떠나 여행 가이드를 시작했다. 2000년 1인 창업으로 시작해 현재 약 110명의 직원들이 함께 하는 중견 여행사가 됐다. 사훈은 ‘늘 가족처럼’이다. / (주)유로자전거나라투어 제공

장백관 대표는 당시를 회고하며 몇 번이나 뜸을 들였다. 그는 “당시 고아들이 너무 많아서 수녀원에서도 부모가 있는 아이들은 다시 집으로 데려다주는데 또다시 아버지로부터 문전박대를 당했다”면서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힘들다. 틀림없이 내 친아버지인데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고 속내를 고백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다. 농구선수로 서울 유수의 대학에 진학할 기회가 있었다. 문제는 기숙사비를 선납해야 하는 것이다. 감독 선생님과 아버지를 찾았다. 아버지는 딱 잘라 거절했다. 그날 이후 아버지에 대한 조금의 미련도 남기지 않고 정리했다.

어머니는 성인이 돼서야 찾았다. 전화번호부에서 어머니의 성함을 찾아 일일이 전화를 걸었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일이 현실로 이뤄졌다. 장백관 대표는 “수화기 넘어로 ‘어디세요?’라고 물을 때 직감적으로 이분이 어머니라는 것을 알겠더라. 목이 탁 메어서 아무 말 못하는데, 어머니가 ‘혹시 백관이니?’라고 물어보셨다. 공중전화 부스에서 대성통곡을 했다”고 말했다. 이후 어머니를 만났지만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재혼으로 이미 어머니에게 새 가정이 있었고, 법적으론 남이었다. 그는 다시 혼자가 됐다.

◇ “고아 장애물 만들지 말고 당당히 맞서라”

고아 출신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취업도, 결혼도 사람들의 편견에 부딪혀야 했다. 하지만 장백관 대표는 고아라는 꼬리표를 한 번도 숨긴 적이 없었다. 그는 “고아가 되고 싶어서 고아가 된 사람은 없다. 자신에게 당당해야 한다. 처음엔 색안경을 끼고 보지만 더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이면 도리어 플러스가 돼 돌아왔다”고 설명했다. 때문에 과거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도 “고아가 숨긴다고 감춰지는 게 아니다. 스스로 자기 성장에 장애물을 만들지 말고 당당히 맞서라”는 것이다. 장백관 대표의 두 아들도 아버지가 외롭게 성장한 사실을 알고 있다.

장백관 대표는 로마의 한 거지에게 50센트를 건넨 것을 시작으로 꾸준히 기부를 이어오고 있다. 무엇보다 시설 아동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 그것이 자신의 삶의 이유라고 생각하는 그다. / (주)유로자전거나라투어 제공
장백관 대표는 로마의 한 거지에게 50센트를 건넨 것을 시작으로 꾸준히 기부를 이어오고 있다. 무엇보다 시설 아동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 그것이 자신의 삶의 이유라고 생각하는 그다. / (주)유로자전거나라투어 제공

큰 아들이 벌써 초등학교 2학년이다. 수녀원에서 오고가는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의 기부 사실을 눈치 챌 만큼 똘똘하다. 장백관 대표도 어깨가 으쓱했다. “대가를 바라고 한 기부는 아니었으나 아이들에게 좋은 영향으로 되돌림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최근 아프리카 탄자니아 아이들을 위한 사업을 시작했다. 수녀님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해 쩔쩔매던 일인데 시간이 갈수록 생각이 달라졌다. 눈빛도 달라졌다. 그는 “몇 천 명이 다녀야 하는 학교다. 그 안에 기숙사도 실습장도 있다. 그 중 하나를 맡을 계획인데, 건물 하나 짓는 게 끝이 아니다.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미션이다”고 말했다.

(주)유로자전거나라도 같이 바빠졌다. 관련 아이템으로 새 기획에 들어갔다. 직원들 상당수가 대표의 뜻을 공감하고 동참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매년 3월이면 관심 있는 직원들과 봉사를 다녀온다는 게 장백관 대표의 설명이다. 매년 회사 차원에서 기부하는 금액만 약 1억원으로 알려졌다. 2015년 1월엔 아름다운재단에 유로자전거나라장학기금을 설립해 보육원을 퇴소하는 학생들의 교육비 지원에 힘쓰고 있다. 그는 “한 번에 잘되는 일은 없다. 수없이 넘어질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의지가 중요하다. 자신의 가능성과 자신의 능력을 믿으라”고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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