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미야, 보고싶다" 23일 오전 한국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실에서 중재판정 이행합의 협약식에 참석한 고 황유미 씨 아버지 황상기 반올림 대표. 그는 "오늘 따라 유미 얼굴이 더 떠오른다"고 말했다.
"유미야, 보고싶다" 23일 오전 한국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실에서 중재판정 이행합의 협약식에 참석한 고 황유미 씨 아버지 황상기(왼쪽) 반올림 대표. 그는 "오늘 따라 유미 얼굴이 더 떠오른다"고 말했다. /조나리 기자

[시사위크=조나리 기자] 삼성전자가 11년 만에 직업병 피해자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삼성 측은 피해자들의 고통을 보살피지 못했다며 사과의 뜻을 밝혔다. 고(故)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는 “삼성 측의 사과는 충분치 않지만, 앞으로의 다짐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황 대표는 협약식을 마친 후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오늘 유미 얼굴이 계속 떠오른다. 조만간 유미에게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김지형 조정위원회 위원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
김지형 조정위원회 위원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 "삼성과 반올림에 경의를 표한다"면서 "역사가 이들의 용기를 기록하고 평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나리 기자

◇ 11년 만에 사과한 삼성 “고통 받은 분들께 사과드린다”

삼성전자와 반올림이 23일 오전 10시30분 한국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실에서 중재판정 이행합의 협약식을 열었다. 이날 협약식에는 직업병 피해자 및 가족 20여명과 김기남 삼성전자 대표이사, 김지형 조정위원회 위원장, 정강자, 백도명 조정위원회 위원, 고용노동부 안경덕 노사정책실장, 안전보건공단 박두용 이사장, 우원식·한정애·강병원·심상정·이정미 의원이 참석했다.

앞서 지난 7월 삼성전자와 반올림은 조정위원회(위원장 김지형 전 대법관)에서 내놓은 중재안을 무조건 수용하기로 약속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조정위원회는 예상보다 한 달가량 늦은 이달 1일 중재안을 내놨다.

(왼쪽부터)김기남 삼성전자 대표이사 사장과 김지형 조정위원장, 황상기 반올림 대표가 협약서에 서명한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조나리 기자
(왼쪽부터)김기남 삼성전자 대표이사 사장과 김지형 조정위원장, 황상기 반올림 대표가 협약서에 서명한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조나리 기자

김지형 위원장은 “이런 자리가 올 것이라고는 거의 생각하지 못했다”면서 “삼성과 반올림, 두 당사자에게 정중한 마음을 담아 경의를 표한다. 역사가 이들의 용기를 기록하고 평가할 것”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김지형 위원장은 향후 지원보상위원회 위원장으로도 활동한다. 삼성과 반올림은 처음부터 김 조정위원장을 보상위원회 위원장으로 지명했으나, 김 위원장의 고사로 합의가 지연되기도 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양측의 간곡한 부탁에 보상위원장을 승낙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보상업무를 위탁할 제3 기관도 김지형 위원장이 속한 법무법인 지평으로 결정됐다.

김 위원장의 인사말이 끝난 후 곧바로 중재판정 이행합의 서명식이 진행됐다. 협약 당사자로 나온 김기남 삼성전자 대표이사와 김지형 위원장, 황상기 반올림 대표는 협약서에 서명한 뒤 이날 처음으로 손을 맞잡았다.

김기남 삼성전자 대표이사가 사과문을 낭독 및 향후 보상계획을 밝히고 있다. 김 대표이사는 이날 "병으로 고통받은 직원분들과 가족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조나리 기자
김기남 삼성전자 대표이사가 사과문을 낭독하고 향후 보상계획을 밝히고 있다. 김 대표이사는 이날 "병으로 고통받은 직원분들과 가족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조나리 기자
(왼쪽부터)뇌손상으로 시력·언어·보행 장애를 얻은 한혜경 씨 어머니 김시녀 씨와 한혜경 씨, 황상기 반올림 대표가 김기남 삼성전자 대표이사의 사과를 듣고 있다. /조나리 기자
(왼쪽부터)뇌손상으로 시력·언어·보행 장애를 얻은 한혜경 씨 어머니 김시녀 씨와 한혜경 씨, 황상기 반올림 대표가 김기남 삼성전자 대표이사의 사과를 듣고 있다. /조나리 기자

이후 김기남 삼성전자 대표이사는 직업병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공개 사과문을 낭독했다. 김 대표는 “소중한 동료와 가족들이 오랫동안 고통 받으셨음에도 삼성전자는 성심껏 보살펴드리지 못했다”면서 “그 아픔을 충분히 배려하고 조속하게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부족했다. 병으로 고통 받은 직원과 가족분들께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중재안에서 정한 지원보상안과 지원보상위원회 위원장이 정하는 세부 사항에 따라 2028년에 이르기까지 보상을 차질 없이 진행하겠다”며 “아울러 새롭게 보상 결정을 받은 분들에게도 사과문을 보내고 위로의 마음을 전하겠다”고 덧붙였다. 김 대표이사는 사과문 낭독을 마친 후 황상기 대표에게 악수를 청했다. 황 대표는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삼성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 한혜경 씨를 소개하며 김 대표이사에게 악수를 권하기도 했다.

황상기 반올림 대표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황 대표는 "삼성전자 이외에도 직업병을 앓고 있는 삼성 계열사 노동자들에게도 보상안을 마련해 달라"고 당부했다. /조나리 기자
황상기 반올림 대표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황 대표는 "삼성전자 이외에도 직업병을 앓고 있는 삼성 계열사 노동자들에게도 보상안을 마련해 달라"고 당부했다. /조나리 기자

◇ 황상기 대표 “삼성 사과, 다짐이라 생각…
정부·국회, 재발방지 위한 제도 개선 나서야”


황상기 대표는 이날 삼성과 정부, 국회를 향해 재발방지 대책을 위한 각각의 노력을 촉구했다. 황 대표는 “삼성전자 대표이사의 사과는 솔직히 충분하지는 않다. 지난 11년간 수없이 모욕당했던 일이나 직업병의 고통을 생각하면 그 어떤 사과도 충분할 순 없을 것”이라며 “그러나 오늘의 사과를 삼성전자의 다짐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직업병 피해자는 삼성전자뿐 아니라 삼성전기, 삼성SDS, 삼성SDI 등 다른 계열사에서도 있다”며 “삼성은 이 모든 직업병 노동자들을 위한 폭넓은 보상을 마련해주시고, 삼성전자가 기탁하기로 한 500억원의 발전기금 역시 노동자들이 땀 흘려 만든 돈이라는 점을 기억해 달라”고 당부했다.

황 대표는 정부와 국회에도 제도 개선을 촉구했다. 그는 “애초에 정부의 산업재해 보상을 받기가 그토록 어렵지 않았다면 직업병 노동자들과 가족들이 이렇게까지 고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정부와 국회는 원청 사업주의 책임을 엄격히 묻는 법제도를 만들어 달라”고 덧붙였다.

삼성전자와 반올림, 조정위원회 관계자들이 협약식 마지막 순서인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조나리 기자
삼성전자와 반올림, 조정위원회 관계자들이 협약식 마지막 순서인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조나리 기자

협약식 마지막 순서에서는 삼성전자와 반올림, 조정위원회 관계자들의 기념촬영이 있었다. 벅찬 표정으로 사진촬영에 임했던 반올림 관계자들은 협약식이 모두 끝난 후 눈물을 쏟아냈다. 특히 뇌손상으로 시력·언어·보행 장애를 얻은 한혜경 씨 어머니 김시녀 씨는 협약식 진행 중에도 많은 눈물을 흘렸다.

마찬가지로 눈물을 보였던 반올림 상임활동가 이종란 노무사는 협약식 후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보상 대상이 넓어져 그나마 다행이지만 여전히 포함되지 못한 피해자들분이 있어서 마음이 무겁다”면서 “앞으로도 정부와 국회를 상대로 산업안전보건법·산재보험법 개정 및 근로복지공단 개혁을 촉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황상기 대표 또한 협약식이 열린 국제회의실을 쉽사리 떠나지 못했다. 이날 황 대표는 평소보다 더 많이 딸 유미 씨에 대한 얘기를 했다. 그는 “오늘 유미 얼굴을 떠올리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다”며 “유미는 유독 희생심이나 배려심이 많은 아이였다. 오늘날 옆에 있었다면 지금도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기억했다.

다만 황 대표는 ‘딸에게 영상편지를 보내달라’는 기자의 요청에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너무 어렵다. 여기까지만 하겠다”며 인터뷰를 마쳤다. 그는 조만간 아내와 함께 유미 씨를 찾아갈 계획이다.

(왼쪽부터)삼성전자 직업병 피해자 한혜경 씨 어머니 김시녀 씨와 한혜경 씨, 황상기 반올림 대표, 반올림 상임활동가 이종란 노무사가 협약식이 끝난 후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김시녀 씨와 이종란 노무사는 눈물을 쏟아냈다. 황상기 대표는 기자들에게 딸 유미 씨와 관련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조나리 기자
(왼쪽부터)삼성전자 직업병 피해자 한혜경 씨 어머니 김시녀 씨와 한혜경 씨, 황상기 반올림 대표, 반올림 상임활동가 이종란 노무사가 협약식이 끝난 후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김시녀 씨와 이종란 노무사는 눈물을 쏟아냈다. 황상기 대표는 이날 기자들과 딸 유미 씨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조나리 기자

한편 반올림과 삼성전자의 분쟁은 2007년 황유미 씨가 백혈병으로 사망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이듬해인 2008년 반올림이 이 문제를 고발했고, 2014년 말 조정위원회가 발족했다. 그러나 2015년 7월 나온 조정안은 당사자들의 이견 차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대화가 중단됐지만 올해 초 대화의 물꼬가 트였고, 조정위원회 출범 4년 만에 최종 합의에 이르렀다.

저작권자 © 시사위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