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발을 떼기가 어려웠을 뿐이다. 그날,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두 손을 맞잡고 함박웃음을 보였다. 사이좋게 군사분계선을 한 발짝씩 넘나들기도 했다. 불식간 찾아온 한반도의 봄에 그간의 추위는 금세 잊을 만했다. 그리고 다시, 봄이다. 1년 전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완연한 봄이 오기까지는 아직 기다려야 한다. 꽃샘추위가 자연의 순리인 것처럼 남북의 봄도 아마 그쯤 머물고 있는 게 아닐까. <편집자주>

남북 관계에 훈풍이 불면서 이산가족들의 간절한 기다림이 결실이 맺을 수 있을지 주목되고 있다./청와대

시사위크=이미정 기자 한반도는 전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다. 우리나라는 해방의 기쁨을 채 맛보기도 전에, 나라가 둘로 쪼개지는 아픔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이산가족이 탄생했다. 애끓는 기다림이 시작된 지도 어느덧 70여년. 지난해 4월 27일 남북한 정상의 ‘판문점 공동선언’을 계기로 남북 관계가 해빙무드를 맞이했지만, 이산가족 문제 해결까지 갈 길이 먼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희망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추진 의지를 이어가는 것은 시대적 과제다.

◇ 북에서 온 답장 “혈육의 정 느꼈다” 

이산가족 박영식 씨는 올해 북측 가족으로부터 상봉 13년만에 기다리던 답장을 받았다./이미정 기자

이산가족인 박영식 씨(73)는 올해 간절히 기다리던 편지를 받았다. 상봉 13년 만에 북측 가족으로부터 받은 첫 답장 편지였다. 지난 10일 서울 을지로 일대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박영식 씨는 품 안에서 곱게 접은 편지를 꺼내보였다.

편지의 발신인은 이복 남동생이었다. 편지의 첫 문장은 “형님의 편지를 받아보았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했다. 동생은 “상봉 이후 한 차례 편지를 받았지만 소식을 전하지 못해 죄송했다”며 “두 번째로 편지를 받고 혈육의 정을 느끼며 눈물을 흘렸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2009년 8월 세상을 떠났으며, 별세 전 아들과 며느리, 손자 얘기를 많이 했다는 일화도 들려줬다. 동생은 “4·27 공동선언이 발표됐을 때, 남쪽의 형님을 만날 수 있기를 꿈꿨다”면서 “꼭 다시 만나자”고 희망했다.

박씨는 2006년 6월 제14차 이산가족대면상봉행사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의 고향은 경북 예천으로 6·25 전쟁통 속에서 가족과 헤어졌다. 당시 그의 나이는 4살 때였다. 60여년만의 극적 상봉은 아버지의 요청으로 이뤄졌다. 박씨는 어머니와 고모, 아내, 아들과 함께 상봉길에 올랐다.

박씨는 상봉 당시 아버지의 첫 인상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박씨는 “작은 체구에 남보다 짐을 많이 들고 온 노인을 보고 별나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이 우리 아버지였다”면서 “아버지는 보따리에 청자 도자기, 북측 가족이 수놓은 자수, 직접 농사지은 농작물 등 값을 매길 수 없는 선물을 한가득 담아왔다”고 회상했다. 상봉 당시 아버지의 나이는 84세다.

박씨 아버지는 북에서 새로운 가정을 이뤘다고 한다. 하지만 남측에 남겨둔 가족들을 잊지 않았고, 정성스럽게 준비한 선물에는 그 절절한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박씨는 “(아버지는) 북에서 살아온 세월이 담긴 사진을 정성스럽게 준비해왔다”며 ”북측 가족들에 대해서도 세세하게 알려줬다. 마치 평생 이날만을 기다린 사람처럼, 만반의 준비를 해온 것 같았다”고 말했다. 손자와의 만남을 기뻐했던 아버지의 모습도 떠올렸다. 박씨는 “아버지에게 북측에 없는 손자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드린 것 같아 뿌듯했다”며 미소를 지었다.

기적 같은 상봉 이후, 박씨는 북측 가족의 소식을 십수년간 접할 수 없었다. 제3국을 통해 서신을 보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지난해 남북이산가족협회를 통해 북측 가족에 서신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편지를 보낸 지 수개월 만에 기다리던 답장을 받았다.  

◇ 정권 따라 달라진 이산가족 상봉의 결실 

분단의 역사 속에서 이산가족들은 간절히 상봉을 바라왔다. 이산가족상봉은 여러 정치적인 상황과 맞물려 어렵게 첫발을 뗐다. 대화의 첫 물꼬는 1971년 8월 12일 당시 최두선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남북적십자회담’을 북측에 제의하면서 트였다. 이듬해 첫 ‘적십자회담’이 열렸다. 하지만 급변한 정치 상황 탓에 대화는 성과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후 1985년에야 교환방문 추진이 합의되면서 첫 대면상봉이 이뤄졌다. 그해 9월 남북적십자사 총재가 각기 151명의 방문단과 함께 서울과 평양을 방문했다. 당시 총 65가족이 만남을 가졌다.

이후 이산가족상봉 추진은 수십 년간 교착 상태에 빠졌다가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큰 변화를 맞이했다. 2000년 6월 남북한 정상이 평양에서 첫 정상회담을 갖고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한 큰 틀의 합의를 이뤘다. 이를 기점으로 이산가족상봉 추진은 급물살을 탔다. 2000년 8월 제1차 이산가족상봉을 시작으로 2003년 2월까지 김대중 정부에서만 6차례 대면 상봉이 이뤄졌다. 통일부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에 따르면 이 기간 남북한 총 1,199 가족(6,210명)이 서로의 얼굴을 확인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남북 이산가족상봉 추진이 다시 활기를 찾고 있다./그래픽=이선민 기자  

2003년 2월 출범한 노무현 정부에선 상봉 횟수가 더 늘어났다. 2007년까지 10회의 이산가족 대면상봉이 성사됐다. 이로써 2,179 가족(1만2명)이 만났다. 2005년에는 첫 화상상봉행사가 이뤄졌다. 그해 1차 화상상봉을 첫 시작으로 2007년 11월 7차례에 이르기까지 557가족(3,478명)이 상봉했다.

물론 그 과정이 마냥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당시 상봉 가교 역할을 했던 한완상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는 지난달 말 본지와의 전화인터뷰에서 당시 비사를 들려줬다. 한 전 총재는 “2004년 468명의 탈북자가 베트남을 통해 한국으로 대량 입국하자 북한은 크게 격양된 반응을 보였다. 당시 정동영 통일부 장관에게도 비난을 쏟아내는 등 상황이 좋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얼어붙은 관계를 풀기 위해 한 전 총재는 북측과의 물밑 대화를 추진했다. 한 전 총재는 “당시 금강산방문 때 북한 측 유력 인사와 만남을 요청했고 이 만남에서 오해를 풀기 위해 애썼다”며 “정동영 장관이 남북관계 개선에 대해 국회에서 발언한 내용을 알려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남북관계는 2008년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 씨 피살 사건을 계기로 다시 얼어붙었다. 이산가족상봉 추진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이산가족상봉은 간헐적으로 이뤄졌다. 각 정부 시절 대면상봉 횟수는 2차례에 불과했다.

대한적십자사가 화상상봉 준비를 위한 개보수 절차에 착수했다./그래픽=이선민 기자

악화됐던 남북관계는 지난해 극적인 ‘화해무드’를 맞이한 상태다. 지난해 4월 27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정상회담을 갖고 완전한 평화 체제 구축과 남북교류 확산을 합의하는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합의 첫 성과로 지난해 8월 제 21차 이산가족행사가 북한 금강산 호텔에서 개최돼 170가족이 상봉했다.

이우영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시사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작년에 이산가족상봉 행사가 있었던 것은 의미가 깊다”고 진단했다. 다만 정례화까지 가지 못한 것에 대해선 아쉬움을 표했다. 그는 “정부가 남북협상에서 이산가족 문제를 좀 더 우선순위에 놓고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남북 정상은 지난해 9월 평양정상회담에서 이산가족문제 근본적 해결을 약속했다. 당시 금강산 이산가족 상설면회소 복구와 화상상봉, 영상편지 교환이 추진 과제로 설정했다. 다만 국제적인 대북 제재와 북미대화 난항으로 상봉과 교류 행사 추진은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지난달에서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화상상봉장 개·보수를 위한 지원물자의 대북 반출에 대한 제재를 풀었다. 최근 남북은 화상상봉을 위한 준비작업에 착수했다.

◇ "고향땅 한번 밟아 봤으면..."  

이산가족 입장에선 애가 타고 있다. 이산가족상봉 신청자 대부분은 고령자로 시간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다. 1988년부터 올해 3월말까지 통일부에 등록된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는 13만3,283명이다. 이 가운데 58.6%인 7만8,098명은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다. 현재 생존자는 5만5,185명에 불과하다. 생존자의 86%는 70대 이상 고령자다. 80대 이상도 64.6%에 달한다.

김용하 통일경모회 이사장은 <시사위크>와의 인터뷰에서 “매년 명절 때마다 임진각에서 실향민들과 함께 합동 제례를 지내는 행사를 열고 있는데, 참석자가 매년 줄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그의 소원은 고향땅을 한번이라도 밟아보는 것이다. 김 이사장은 “이전 정부 때보다 남북한의 대화가 되고 있어 기대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면서도 “이제는 상봉보다는 고향땅이라도 밟아보고 죽으면 한이 없을 것 같다”고 전했다.

이산가족 대부분은 가족의 생사라도 확인할 수 있기를 소망하고 있다. 김경재 남북이산가족협회장은 “생사확인이 제일 우선돼야 한다”면서 “살아있는지 확인이 돼야 상봉도 기대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당국 차원에서 지금까지 확인한 생사 확인은 8,262건이다. 이산가족상봉 신청자만 13만명에 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쉬운 수치다.

상봉 이후 가족 간의 교류 지속도 필요하다. 박영식 씨처럼 편지라도 자유롭게 주고받는다면 이산가족에겐 희망적이다. 박씨는 “민간 차원에서 소식을 전달할 방법도 있는 만큼, 이산가족들이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면서 “정부는 적극적인 생사 확인과 서신교환, 고향방문단 추진 등이 이뤄지길 노력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바람은 후세대에게 이어지고 있다. 이산가족 2세대인 장만순 일천만이산가족위원회 위원장은 “아버지 세대의 뜻을 이어가는 것이 후세대의 과제”라며 “단체에서도 활동을 이어갈 2·3세대를 키우고 있다”고 전했다. 일천만이산가족위원회는 실향민 단체이자 유엔 경제사회이사회에 등록된 비정부기구 단체다.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사회 호소활동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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