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희 여성환경연대 시민참여팀장

‘세류성해(細流成海).’ 가는 물줄기가 모여 큰 바다를 이룬다는 뜻이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 작은 힘이 모이면 큰 변화를 일으킨다는 의미와도 맥이 닿아있다. 우리는 이미 지난 촛불혁명을 통해 이를 경험했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꾼 것은 거대 권력도 아니고 정치적인 어젠다도 아니었다. ‘국민주권’을 위해 행동했던 ‘시민들의 힘’이었다. 하지만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 이에 <시사위크>에서는 대한민국 변화를 이끄는 중심, ‘시민운동가’들의 릴레이 인터뷰를 통해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제언을 경청해본다. [편집자주]

지난 21일 서울 영등포구 여성미래센터에서 기자와 인터뷰 중인 김양희 여성환경연대 시민참여팀장. 대학생 시절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보여준 끈끈함과 우정을 통해 여성 운동에 매력을 느끼게 됐다는 김 팀장은 화학물질과 가공식품으로부터 자유로운 대안적인 삶의 가치에도 높은 관심을 갖고 있다. / 사진=김경희 기자
지난 21일 서울 영등포구 여성미래센터에서 기자와 인터뷰 중인 김양희 여성환경연대 시민참여팀장. 대학생 시절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보여준 끈끈함과 우정을 통해 여성 운동에 매력을 느끼게 됐다는 김 팀장은 화학물질과 가공식품으로부터 자유로운 대안적인 삶의 가치에도 높은 관심을 갖고 있다. / 사진=김경희 기자

시사위크=범찬희 기자  100만부 이상 팔린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흥행이 보여주듯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은 더 이상 비주류 담론이 아니게 됐다. 불편함을 넘어 때로는 증오를 유발하는 존재로 비춰지던 페미니스트들은 그저 평등의 가치를 추구하는 ‘상식적인 현대인’으로 서서히 인식돼 가고 있다.

최근 <시사위크>가 만난 김양희 여성환경연대 시민참여팀장 역시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보통 사람’이다. 굳이 차이점을 찾자면 ‘평등’과 ‘환경’에 조금 더 관심이 많다는 정도랄까. 아침 찬바람을 맞고 센터를 찾은 기자에게 “헛개나무가 몸에 좋다”며 따뜻한 차 한 잔을 내준 그의 말 한마디는 시민운동가이기 이전에 ‘인간 김양희’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인상으로 기자의 뇌리에 박혀있다.

◇ 생리대 사건 후 2년… “안전한 월경용품 인식 높아져”

김양희 팀장은 아직 국내에서는 생소하게 들릴 수 있는 ‘에코페미니즘’을 실천하는 활동가다. 두 단어가 결합된 합성어가 보여주듯 여성의 관점에서 생태적 대안을 찾고자 하는 게 그와 여성환경연대가 추구하는 방향성이다. 지성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철학도였던 김 팀장은 대학 시절 인연을 맺은 ‘사람’에게 끌려 이 길에 접어들게 됐다고 차분히 말문을 열었다.

“청년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 활동과 같은 대안적인 커뮤니티를 만드는 데 관심이 많았다. 대학 졸업 즈음 신촌에 공간을 마련해 놓고 영화제, 마을 카페 등 여러 사람이 함께할 수 있는 활동을 했었다. 그렇다고 학교생활을 등한시 한 건 아니다. 범생이라서...(웃음)”

청춘의 시간을 함께 나눈 친구들은 각자의 인생을 찾아 다양한 분야로 흩어졌다. 특정 정당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대학원에 진학해 학업을 이어간 친구도 있다. 도서관 사서로 진로를 정한 친구도 있으며 귀농을 택한 경우도 있다. 물론 평범하게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다. 시민단체 팀장 직함을 달고 있는 김 팀장은 어쩌면 당시 무리들 중에서 활동 경력을 가장 잘 살린 ‘모범적인’ 케이스라고 볼 수 있겠다.

“여성들이 많은 조직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나 문화가 남다르게 느껴졌다. 마을 만들기나 대안 문화 쪽에 관심을 가지며 만나게 된 사람 중 페미니즘 경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끈끈함과 우정이 본인으로 하여금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환경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도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면서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알러지가 생겨 몸을 돌아보게 됐다. 지금까지 먹어온 음식이나 생활 환경 등 의식주 전반에 대해 반추하게 됐다. 채식 위주의 식사와 화학물질을 멀리하는 삶을 살다보니 몸이 좀 나아지더라.”

2008년 폐지된 일회용 컵 보증금 제도 부활에 앞장서 온 김 팀장과 여성환경연대는 최근 환경부가 관련 제도를 도입하도록 하는 성과를 거뒀다. / 사진=김경희 기자
2008년 폐지된 일회용 컵 보증금 제도 부활에 앞장서 온 김 팀장과 여성환경연대는 최근 환경부가 관련 제도를 도입하도록 하는 성과를 거뒀다. / 사진=김경희 기자

여성환경연대는 김 팀장과 직결된 일상 속 화학물질 사용에 관한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해 온 단체다. 2017년 릴리안 생리대 파동이 대표적이다. 깨끗한나라의 릴리안 생리대를 사용한 후 생리통이 심해지거나 생리양이 줄었다는 등 신체 변화를 호소하는 여성들이 속출하면서 제품 안전성이 도마에 올랐다. 늑장 대응 비판을 받은 식약처는 시판되는 생리대에 함유된 휘발성유기화합물(VOCs)이 ‘우려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려 ‘기업 봐주기’라는 후폭풍에 시달려야 했다. ‘제2의 가습기 살균제’로 기록된 릴리안 생리대 사건은 ‘안전한 월경용품’에 대한 인식을 한국 사회에 확신시킨 계기가 됐다.

“그때만 해도 정부가 생리대 유해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강했다. 피해를 주장하는 여성들이 속출하고 있는데 인과관계를 규명하려 하지 않더라. 전성분 표시제가 지난해부터 실시됐지만 허점투성이다. 현재 진행 중인 역학조사 결과가 최종적으로 어떻게 나올지도 의문스럽다. 사건 이후 생리컵, 면 생리대 등에 대한 수요가 폭발했다. 일회용 생리대 문제가 터지면서 안전한 월경용품을 요구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커진 거다. 생리컵은 이전까지 국내에서 판매가 이뤄지지 않았다. 종종 해외에서 구매하는 여성들이 있었지만 사용에 거부감이 컸다.”

김 팀장은 2017년 생리대의 안전성 문제를 촉발시킨 릴리안 사건 이후 국내에 안전한 월경용품 수요가 늘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특정 회사 제품의 안전성을 지적한 대가로 여성환경연대는 억대의 송사에 휘말렸다. / 사진=김경희 기자
김 팀장은 2017년 생리대의 안전성 문제를 촉발시킨 릴리안 사건 이후 국내에 안전한 월경용품 수요가 늘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특정 회사 제품의 안전성을 지적한 대가로 여성환경연대는 억대의 송사에 휘말렸다. / 사진=김경희 기자

◇ 11년 만에… 일회용 컵 보증금제 부활 성과

릴리안 생리대 사건에서 총대를 맨 여성환경연대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사건이 잠잠해지자 깨끗한나라에서 여성환경연대를 상대로 억대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여성환경연대가 적합하지 않은 실험 방법으로 제품 신뢰성을 떨어뜨려 영업 활동에 심각한 차질이 발생했다는 판단에서다. 사건 이후 기업들이 프리미엄이라는 이름을 붙여 고가의 생리대를 판매하게 된 것도 김 팀장이 안고 있는 고민거리다. 이는 청소년들에게 생리대를 무상 보급하는 정책을 정착시키고자 하는 여성단체의 운동과는 정반대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인터뷰 진행 후 며칠 뒤 한 가지 희소식이 전해졌다. 정부에서 일회용 컵 유상 판매 제도를 도입하고 보증금 제도를 다시 부활시킨 것이다. 일회용 컵 보증금제 도시행은 김 팀장과 여성환경연대가 환경 분야에서 중점적으로 추진해 온 운동이다. 2008년 보증금 제도가 폐지되면서 카페 매장 당 일회용 컵 사용이 4배가량 증가한 것으로 전해진다. 2016년 관련 법안이 발의 됐지만 3년째 표류한 상태로 떠돌았다. 유관 환경단체와 연대해 커피전문점에서 플라스틱 빨대를 퇴출시킨 여성환경연대는 텀블러 등 다회용 컵 사용이 문화로 정착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끝을 향해 달려고 있는 2019년은 김 팀장과 여성환경연대에게 각별하다. 바로 단체가 설립된 지 2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다. 이를 기념해 에코페미니즘의 주요 이슈들을 담은 책(Ecofeminism-원하는 모습으로 살고 있나요?)을 발간했다. 내년 출시를 목표로 20주년을 기념하는 백서도 준비 중에 있다.

문득 하루가 멀다 하고 급변하는 속세에서 ‘느림의 미학’을 추구할 수 있는 그의 비결이 궁금했다. 기자의 우문에 그는 “가급적 돈으로 해결하지 않으려고 한다. 옷은 주변 사람들과 나눠서 공유한다. 점심도 활동가들과 함께 사무실에서 만들어 직접 해결한다. 대신 재료는 유기농으로 좋은 걸 쓴다”면서 “덜 쓰고 만족하는 삶을 터득하니 불편함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현답을 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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