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시사위크 특별기획] Ⅱ. 놀 권리

어린이는 우리의 미래이자, 우리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 어린이가 행복하지 않은 사회는 결코 희망적이지 않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어린이 삶의 만족도가 OECD 최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그럼에도 어린이 행복권 신장은 우리 사회 화두에서 늘 벗어나 있다. 어린이들의 눈높이에서 바라보고, 어린이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노력이나 인식을 찾아보기 힘들다. 어쩌면, 우리는 어린이들을 잘 키우고 있다는 깊은 착각에 빠져있는 것은 아닐까. <시사위크>는 2020년을 맞아 우리 사회 곳곳에 놓여있는 어린이 문제들을 톺아보며 어린이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사회를 그려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우리사회는 아동의 놀이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할 뿐 아니라, 놀이를 위한 인프라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뉴시스
우리사회는 아동의 놀이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할 뿐 아니라, 놀이를 위한 인프라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뉴시스

시사위크=권정두 기자  OECD 최악 수준인 우리 아이들의 불행한 현실을 바꿔나가기 위해 가장 시급한 숙제는 ‘놀이의 정상화’다.

우리사회는 기본적으로 아이들에게 왜 놀이가 필요한지에 대한 인식 자체가 부족하다. 대다수 부모들은 오히려 아이들이 노는 것을 ‘허송세월’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어른들에게 적정한 휴식과 취미·여가활동이 있어야하듯, 아이들에겐 그 나이 대에 맞는 놀이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와 관련된 국제사회의 인식 및 움직임은 이미 1900년대 초부터 이어져오고 있다. 1922년 발표된 ‘세계아동헌장’의 제25조는 모든 학교가 아동이 방과 후에 놀 수 있는 놀이터를 갖춰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2차 대전 직후인 1959년 유엔이 채택한 ‘아동권리선언’도 제7조에 ”놀이 및 레크리에이션은 교육과 동일하게 다뤄져야 하며 사회 및 공공기관은 아동의 놀 권리 향유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1989년 채택된 유엔아동권리협약 역시 제31조를 통해 “아동은 휴식과 여가를 즐기고 놀이와 오락활동에 참여하며, 문화생활과 예술활동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며 아동의 놀 권리를 명시했다.

이처럼 아동의 놀이가 강조되는 이유는 정서적·신체적 건강과 사회성 등을 형성해나가는 가장 기본적인 과정이며,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본능이기 때문이다.

이는 ‘아동놀이를 위한 국제협회’가 1977년 얄타회의를 통해 제정한 ‘아동의 놀 권리 선언’에 잘 담겨있다. 이 선언은 ”놀이는 단순히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다. 놀이는 삶이다. 놀이는 본능이고, 자발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또한 탐구하는 것이며 소통하고 표현하는 것이다. 놀이는 행동과 생각을 함께하도록 한다. 놀이는 만족감과 성취감을 준다. 놀이는 모든 문화와 역사에서 이뤄졌다. 놀이는 삶의 모든 영역과 연관돼있다. 놀이를 통해 아동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감정적으로, 사회적으로 성장하며 놀이는 삶을 배워가는 방법의 하나다“라고 강조한다.

아기들의 성장과정을 들여다보면 보다 쉽게 이해가 가능하다. 아기들은 딸랑이 흔들기나 ‘곤지곤지’ ‘잼잼’ 같은 놀이를 통해 신체발달을 이뤄간다. 조금 더 자라면 ‘까꿍놀이’ 등을 통해 인지력과 사고력 등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이후에도 아이들의 놀이는 곧 각종 성장과 연결된다.

이는 비단 영유아 시기만이 아니다. 초등학교 저학년과 고학년은 물론, 중·고등학교로 이어지는 청소년기에도 놀이의 필요성과 중요성은 계속된다. 어른들에게 적절한 취미·여가생활이 필요한 이유도 다르지 않다.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채로 방치돼있는 놀이터의 모습. /뉴시스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채로 방치돼있는 놀이터의 모습. /뉴시스

거꾸로 말하면 놀이의 제한은 본능을 억제하는 것이자, 우리사회의 미래인 아이들을 비정상적인 성장에 빠뜨릴 수 있는 중대한 문제다. 그런데 20세기 후반 전쟁과 산업화를 거친 우리나라의 눈부신 발전은 그와 비례해 아이들로부터 놀이를 빼앗았다.

앞서 살펴봤듯 우리 아이들의 놀이시간은 세계 최고 수준인 사교육을 비롯한 학습시간이 잠식했다. 부족한 것은 비단 놀이시간 만이 아니다. 놀이를 위한 공간 등 인프라도 적절히 보장되지 않고 있다. 골목길이나 공터에서 또래 친구들과 술래잡기 등을 하며 어울려 놀던 아이들의 모습은 이제 ‘그때 그 시절’ 풍경이 됐다. 주거 환경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향상됐고 안전·위생 등의 기준 및 인식도 대폭 강화됐지만, 역설적으로 아이들의 놀이는 점점 더 설자리가 좁아졌다.

공장에서 찍어내듯 천편일률적인 놀이터는 어른들의 관점이 더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놀이터 조성의 출발점이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더 즐겁게 놀 수 있을까’가 아닌, ‘각종 기준에 부합하면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게 할 수 있을까’에 맞춰져 있는 현실이다. 놀이터의 안전기준이 강화되면서 아예 놀이터 숫자가 줄어든 현상은 아동 놀이에 대한 우리사회의 인식이 얼마나 잘못돼 있는지 고스란히 보여준다.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중학교 1·2학년 정도로 이어지는 시기의 아이들은 더욱 심각하다. 놀이공간은 물론 놀이문화 자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렇다보니 이 시기 아이들의 놀이는 대부분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로 즐기는 게임이나 노래방·오락실 혹은 각종 프로그램 및 예체능 활동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바람직한 놀이의 방향으로 보기 어렵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놀이의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은 자기주도성이다. 또한 일정 수준의 신체활동과 사람 간의 상호작용이 동반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이가 아무리 재미와 흥미를 느낀다 해도, 게임이나 누군가의 지도를 따르는 프로그램 및 예체능 활동은 진정한 의미의 놀이로 볼 수 없다.

열악한 놀이 인프라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으로도 이어진다. 점차 존재감을 잃어가고 있는 놀이터를 대신해 눈에 띄게 증가한 시설은 키즈카페다. 각종 신체활동을 겸할 수 있는, 으리으리한 규모 및 기구를 갖춘 실내놀이시설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시설을 이용하기 위해선 상당한 비용이 필요하다. 부모의 경제적 능력이 아이의 놀이 또한 좌우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우리사회의 아동 놀이가 최악의 지경에 이른 근본적인 원인은 간단하다. 우리사회는 아동 놀이에 대한 인식 자체가 턱없이 부족하다. 이에 대한 문제의식조차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가운데, 온갖 요인들이 사태를 더 악화시켰다.

어른들의 경우 시대흐름에 따라 워라밸이 강조되고 이를 위한 변화도 이어졌지만, 아동 놀이 문제는 방치된 채 후퇴만 거듭했다. 이와 관련된 연구활동이나 정부 차원의 움직임도 부족하기만 했다. 아이들을 더 나은 곳으로 이끌어야할 어른들이 직무유기를 한 것이다.

“어린이는 즐겁고 유익한 놀이와 오락을 위한 시설과 공간을 제공받아야 한다.”

1957년 우리나라 정부가 선포한 ‘대한민국 어린이 헌장’의 내용이다. 50년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이 헌장은 공허한 헛구호에 머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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