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라고 해도 무방한 무한 경쟁이 펼쳐지는 척박한 세상에서 태어나자마자 친부모로부터 버림받고 의지할 곳 없이 외롭게 홀로 서야 하는 아이들이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베이비박스를 통해 매년 수백명의 아기들이 친부모에 의해 세상 속에 홀로 유기되고 있다. 우리는 뉴스를 통해 베이비박스 아기들의 슬픈 사연을 종종 듣는다. 베이비박스에 유기되는 아기들을 줄일 수 있는 현실적인 대책은 없을까. <시사위크>는 베이비박스 설치 11년의 실태를 점검해보고 유기 아동을 줄일 수 있는 근본적 대책에 대해 고민해보고자 한다.

서울 주사랑공동체교회는 지난 2009년 12월 국내 최초로 베이비박스를 설치했다./주사랑공동체교회
서울 주사랑공동체교회는 지난 2009년 12월 국내 최초로 베이비박스를 설치했다./주사랑공동체교회

시사위크=김희원 기자  최근 아동 학대와 함께 아기 유기 관련 사건이 끊이지 않으면서 사회적 공분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 2일 저녁 한 20대 여성이 서울 주사랑공동체교회에 설치된 베이비박스 맞은편 드럼통 위에 아기를 놓고 가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달 16일에는 중고 물품 거래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인 당근마켓에 20대 여성이 20만원이라는 판매 금액과 함께 ‘아이 입양합니다. 36주 됐어요’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사회적 지탄을 받은 바 있다.

친모가 ‘베이비박스’ 인근에 아기를 유기해 사망하게 한 사건은 ‘베이비박스’ 찬반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 같은 사회적 논란은 아기 유기를 줄일 수 있는 근본적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부분 미혼모들이 아기를 유기하고 있기 때문에 미혼모들에 대한 국가 차원의 지원 체계를 제대로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주사랑공동체교회가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지금까지 베이비박스에 들어온 아기들의 친부모 60% 안팎이 미혼 상태인 것으로 파악됐다./그래픽=이현주 기자
주사랑공동체교회가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지금까지 베이비박스에 들어온 아기들의 친부모 60% 안팎이 미혼 상태인 것으로 파악됐다./그래픽=이현주 기자

◇ 정부 “영아 유기·살해 다수가 미혼모 아동”

주사랑공동체교회가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베이비박스에 아기를 두고 간 친부모의 가정 상황은 미혼인 경우가 60% 안팎인 것으로 집계됐다. 올해의 경우는 미혼이 70%가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도별로 보면 △2017년 미혼 68%, 기혼(양부모‧이혼) 10%, 외도 16%, 기타 6% △2018년 미혼 59%, 기혼 17.5%, 외도 17.5%, 기타 6% △2019년 미혼 63.5%, 기혼 15.3%, 외도 14.7%, 기타 6.5% △2020년(1~10월) 미혼 72.1%, 기혼 11.8%, 외도 13.2%, 기타 2.9%다.

정부는 지난 16일 여성가족부·법무부·보건복지부 등과 공동으로 발표한 ‘미혼모 등 한부모 가족 지원 대책’에서 “아이를 낳아도 양육하지 못하는 미혼모가 여전히 많아 유기, 입양되는 아이들 중 미혼모 출산 아동이 다수”라고 진단했다.

정부는 또 지난 10년간(2010∼2019년) 영아 유기 1,272건, 영아 살해 110건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상당수가 미혼모 아동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2019년 전국적으로 미혼모는 2만761명, 2018년에는 2만1,254명인 것으로 집계됐다.

◇ 정부, 미혼모 지원 시스템은?

현재 정부의 미혼모 지원 체계는 어떻게 이뤄져 있을까. 정부는 임신 및 출산 후(6개월 미만) 양육과 숙식을 지원하는 미혼모자 시설을 서울·부산·전남 등 전국에 21곳을 운영하고 있다. 또 출산·양육지원(연간 70만원 지원), 병원비·양육용품 제공, 교육·문화프로그램 등을 지원하는 권역별 미혼모부자 거점기관 17개소를 가동하고 있다.

이와 함께 정부는 만 25세 이상 저소득 한부모 가족에게는 아동 1인당 양육비 월 20만원을, 만 24세 이하인 청소년 한부모 가구에는 아동 1인당 양육비 월 35만원을 지급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베이비박스 앞 신생아 사망 사건과 당근마켓 ‘20만원 입양글’ 게시 사건이 발생하면서 정부의 이 같은 미혼모 대책을 시급히 개선해야 한다는 비판이 거세게 제기됐다.

이에 정부는 지난 16일 ‘미혼모 등 한부모 가족 지원 대책’을 서둘러 발표했다. 정부는 이날 “미혼모 등 한부모 가족의 양육 환경 개선과 차별 해소를 하겠다”고 목표를 제시하며 △임신·출산 과정에서의 지원 강화 △출산·양육 관련해 차별적 제도 개선 △아동양육비 등 안정적 자녀 양육 지원 △학업 및 취업 등 자립 지원 등 4대 지원 방안을 내놨다.

이와 관련 한국미혼모가족협회 김도경 대표는 25일 <시사위크>와 통화에서 “정부에서 급하게 대책을 냈는데 언제 되고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다”고 다소 회의적 반응을 보이며 미혼모 대책이 실효성을 갖기 위해서는 관련 예산 확보가 뒷받침이 돼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김 대표는 “미혼모 관련 긴급 (전화) 상담을 하고 있지만 말로만 상담을 할 것이 아니라 주거가 필요하면 주거로 연결되고 돈이 필요하면 돈으로 연결돼야 하는데 상담만 하고 있을 뿐 그에 대한 예산이 없다”며 “미혼모부자 거점기관도 사업비가 너무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지금 정부가 미혼모 지원 사업이 여러 가지 있다고 눈으로는 보여주는데 안으로 들어가면 거의 껍데기들 뿐이다”고 비판했다.

미혼모 단체 회원들이 25일 오후 서울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보호출산제 도입 반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뉴시스
미혼모 단체 회원들이 25일 오후 서울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보호출산제 도입 반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뉴시스

◇ 아기 유기 막을 제도적 개선책은?

일각에서는 아기 유기를 막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 중 하나로 산모가 익명으로 아기의 출생 신고를 할 수 있는 제도인 ‘비밀출산제’ 내지는 ‘보호출산제’ 도입 필요성이 거론되기도 한다.

지난 2012년 입양특례법이 개정되면서 아이를 입양 보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입양 전 출생신고를 먼저 해야만 한다. 이 때문에 개인정보 노출을 우려한 산모가 입양 대신 유기를 선택하는 경우가 꾸준하게 늘었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이에 따라 정부는 지난 16일 ‘미혼모 등 한부모 가족 지원 대책’을 내놓으며 산모가 출산 후 자신의 신원을 노출하지 않고 출생 등록을 할 수 있는 보호출산제 도입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영아 유기, 영아 살해 등 심각한 문제를 줄이기 위하여 출생신고 단계에서의 미혼 산모의 개인정보 보호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국회에서도 이와 관련된 법안 발의가 준비 중이다. 더불어민주당 조오섭 의원은 입양특례법 개정안을 조만간 발의할 예정이고, 국민의힘 김미애 의원은 ‘비밀출산법’(보호출산법)을 이르면 이번주 발의할 계획이다. 

조오섭 의원은 25일 <시사위크>와 통화에서 “준비 중인 입양특례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아기 유기를 줄이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아기는 유기돼서는 안되고, 시설에서 자라는 것보다 가정에서 자랄 수 있는 권리를 누려야 되기 때문에 현행 법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법을 개정하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김미애 의원은 이날 <시사위크>와의 통화에서 “2012년 현행 입양특례법이 시행되면서 입양을 보내려면 출생신고를 해야 하기 때문에 베이비박스 등을 통한 아기 유기가 많아진 것”이라며 “산모가 본인의 이름이 아닌 익명 내지 가명으로 출생 신고를 할 수 있게 하고, 아기는 입양을 갈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전문가 그룹에서는 비밀출산제를 도입하려면 ‘아기의 친부모 알권리’를 보장하는 장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지적도 제기한다.

정익중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비밀출산제 도입’ 필요성을 지적하면서도 “비밀출산제는 친부모의 신원을 보관하고 있다가 아기가 만 18세가 됐을 때 친부모도 동의하고 아이도 동의하면 신원을 공개할 수 있도록 진행돼야 한다”며 “그냥 아기를 버릴 수 있기만 하면 친부모에게만 유리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미혼모 관련 단체는 정부의 보호출산제 도입 추진을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보호출산제가 친부모가 아기를 직접 기를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입양을 조장한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혼모, 한부모단체 및 아동인권단체는 이날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보호출산제는 (부모의)출생기록 은폐로 부모와 자녀의 확실한 분리를 만드는 제도”라며 “지금 필요한 것은 ‘보호출산제’가 아니다. 정부는 임신 초기 상담부터 지원까지 종합적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위기 임신 출산 지원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미혼모에 대한 인식 변화도 시급

아기 유기를 줄이기 위해서는 제도적 개선책 마련과 함께 미혼모에 대한 인식 변화가 시급하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지난 2009년 ‘베이비박스’를 국내에서 가장 먼저 설치한 주사랑공동체교회 이종락 목사는 “우리나라는 미혼모라고 하면 선입견을 갖고 냉대하고 소외시키고 무시한다.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 때문에 딸이 미혼모라고 하면 집안 망신이라고 생각한다”며 “이런 문화부터 빨리 정리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목사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체면이 아닌 아기의 생명”이라며 “미혼모가 안전하게 아이를 키울 수 있는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소망이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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