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염혜란의 시대가 열렸다. /찬란
배우 염혜란의 시대가 열렸다. /찬란

시사위크=이영실 기자  배우 염혜란은 어떤 옷을 입어도, 어떤 역할을 맡아도 작품 안에 그저 그 자체로 존재한다. 인간미 넘치는 따뜻한 이웃이었다가,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였다가, 할 말은 하고야 마는 ‘걸크러시’ 변호사였다가, 삶의 고단함이 그대로 묻어있는 아내이자 엄마의 얼굴까지. ‘흉내’내는 것이 아닌 그 인물로 살아 숨 쉰다. 그가 등장하는 모든 순간, 눈을 뗄 수 없는 이유다.

연극 무대에서 내공을 쌓다 뒤늦게 매체로 활동 반경을 넓힌 염혜란은 탄탄한 연기력을 바탕으로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넘나들며 종횡무진 활약 중이다. 특히 ‘동백꽃 필 무렵’(2019)을 통해 진가를 인정받은 그는 최근 종영한 OCN ‘경이로운 소문’까지 연이어 좋은 평가를 이끌어내며 데뷔 이래 최고 전성기를 보내고 있다.

스크린 행보도 뜨겁다. 영화 ‘새해전야’(감독 홍지영), ‘아이’(감독 김현탁), ‘빛과 철’(감독 배종대)까지 이달에만 무려 세 편의 영화로 관객과 만나고 있다. 따뜻한 ‘동생 바라기’의 모습부터 서늘한 얼굴까지, 다채로운 모습으로 다시 한 번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그중에서도 ‘빛과 철’은 염혜란의 연기 정점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편의 교통사고로 얽히게 된 두 여자와 그들을 둘러싼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담은 미스터리 ‘빛과 철’에서 피해자의 아내 영남으로 분한 그는 교통사고 후 의식불명이 된 남편과 남은 딸을 위해 고단한 삶을 괜찮은 척 살아가는 엄마의 담담한 얼굴부터 말 못 할 사정을 품은 인물의 미스터리한 내면을 깊이 있게 담아내 호평을 얻고 있다.

특히 거짓보다 뼈아픈 진실과 마주하는 과정에서 영남의 진폭이 큰 감정 변화를 치밀하게 담아내 몰입도 높였다는 평이다. 이러한 열연으로 염혜란은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배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최근 화상 인터뷰에서 만난 염혜란과의 대화를 통해 그의 ‘꽃길’이 결코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어떤 것도 허투루 하지 않고, 매 장면 치열하게 고민하고 매달리는 그의 ‘열정’과 ‘노력’이 더해진 값진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초심’을 더욱 단단히 붙잡고 있는 모습에서 그의 전성기가 오래도록 이어질 거란 ‘확신’이 들었다.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넘나들며 종횡무진 활약 중인 염혜란. /찬란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넘나들며 종횡무진 활약 중인 염혜란. /찬란

-작품을 택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
“시나리오가 주는 힘이 컸다. 하지만 결정하기 쉽진 않았다. 감정의 깊이가 커서 부담감도 컸다. 그런데 또 한편으론 인물의 깊이를 더 드러내고 싶은데 조연이라 아쉽게 끝날 때가 있었는데, 영남이라는 인물을 통해 감정의 진폭이나 변화를 쭉 보여줄 수 있겠구나 싶더라. 아쉬움 없이 다 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결정한 것도 크다. 또 감독님에 대한 믿음도 컸다. 작품에 대해 고민을 정말 많이 하고, 가식 없이 젠체하지 않더라. 함께 작업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은 어렵고 무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결말을 소화하는데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는데, 배우는 처음 시나리오 보고 어떤 느낌이 들었나. 또 완성된 영화를 보면서 새롭게 느낀 감정이 있다면. 
“대본으로 보면 조금 더 쉬울 수도 있을 거 같다. 시나리오를 보면서 그래서 어떻게 되는 걸까, 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그러다 살짝 가지 하나 잡아당겼는데, 그 안에서 고구마 줄기가 나오듯 사건들이 딸려 나오는 게 너무 흥미로웠다. 몰입력이 대단했고, 정말 재밌게 읽혔다. 나 역시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결말은 어떤 의미인지 감독님에게 질문을 계속 던졌다. 감독님과 이야기를 하면서, 엄청 많은 고민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참여할 수 있었다.

또 하나 감독님이 강조한 것은 이 이야기가 이렇게 끝나서 찝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우리 모두 행복했다’까지는 아니더라도, 인물들이 조금 더 평화를 찾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 새롭게 한 발을 디딜 수 있는 기운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고, 나도 너무 힘들게 끝나는 게 아니라 미래가 보였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다. 그래서 마지막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고 지금의 결말이 나오게 됐다. 열린 상태로 두는 게 더 많은 질문을 하게 되더라. 단순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보다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 나는 지금의 결말이 좋다.”

-캐릭터를 구축하면서도 감독과 많은 의견을 나눴을 것 같은데, 영남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지점은 무엇인가. 배우의 의견이 반영된 부분이 있다면. 
“겪지 않은 일이기도 하고, 감정의 무게가 워낙 커서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전체적인 분위기가 무겁고 첨예한 갈등을 겪는데, 그 안에서 영남이 어떻게 살아있을 수 있을까 고민했다. 영남이 남편의 간병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늘 슬프거나 고통스럽진 않을 것이고, 삶을 살아가고 있을 텐데 일상의 기운이 느껴지면 좋겠다는 의견을 냈고, 감독님도 동의했다. 그래서 많이 나오진 않지만, 인물의 일상이나 생활감이 느껴지는 장면들이 반영이 됐다. 감정의 깊이를 따라가기엔 정말 어려웠다. 오랫동안 환자를 간호해 오고 있는 사람들의 영상이나 다큐멘터리를 참고하기도 했다. 연기가 모호한 느낌으로 흐르면 안 될 것 같아서 정확한 이유를 갖고 연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끊임없이 질문을 해나가면서 임했다.”

-감정의 진폭뿐 아니라, 무언가 비밀을 숨기고 있는 듯한 미스터리함까지 담아내야 했다. 어떤 어려움이 있었나.
“감독님이 미스터리 장르물의 성격을 고수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오히려 감정적으로 폭발하는 장면보다, 영남이 처음 희주(가해자의 아내, 김시은 분)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의도가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더 많이 촬영을 했다. 그냥 보기만 하면 되는 쉬운 장면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잘 안되는 거다. 감독님은 영남이 희주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봤으면 좋겠다는 주문을 하는데, 그게 어려웠다. 미스터리를 찍을 땐 그냥 연기하는 것과 다르게 계산해야 하는 부분이 하나가 더 있더라. 그래서 어려웠고, 감독님과 대화도 더 많이 필요했다. 어디까지 보여주고 어떻게 보여줄 것이냐에 대해서도 플랜을 짜야 했다.”

영화 ‘빛과 철’에서 새로운 얼굴을 보여준 염혜란. /찬란
영화 ‘빛과 철’에서 새로운 얼굴을 보여준 염혜란. /찬란

-희주를 향한 영남의 감정에 대해 감독이 강조한 부분과 배우의 해석은 무엇이었나.
“나는 뭔가 아는 듯 다가가고 싶었는데, 감독은 감추고 싶었던 것 같다. 오히려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 친절한 누군가가 접근하길 원했다. 그런데 나는 뭔가를 말하고 싶은 게 있었다. 그날의 진실이라기보다 당신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영남은 희주를 보며 당신도 아픈 사람이고, 많이 힘들 텐데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영남이 희주에게 ‘당신 참 불쌍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음흉하거나 무언갈 감추기 위함이 아니라 본인과 같은 피해자의 입장으로 생각하고 다독이고 싶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좋은 뜻이라고 해석했다. 처음부터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무서운 사람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걸 의도한 것은 아니다. 연기하면서 나 역시 영남이 희주의 존재를 언제부터 알았는지 궁금했고, 중요했다. 감독님에게 가장 많이 한 질문이기도 하다.”

-배종대 감독이 이번 작품을 통해 염혜란의 새로운 얼굴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본인도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 지점이 있는지.
“그 말이 너무 고마웠다. 나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그 모습을 작품에서 보여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생각이 들어 작품을 택한 것도 있었다. 영남이 화재사고를 보고 돌아서 오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그 얼굴이 되게 좋더라. 배우가 뭔가를 많이 칠하지 않고 그 상태에서 돌아 나오는데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그 스틸 하나에 영남이 갖고 있는 고단함과 어떤 생각들이 잘 담겨있어서 기분이 좋더라. (배종대 감독이) 배우의 좋은 얼굴을 잘 잡아냈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쁜 장면이다. 폭발하는 장면보다 그런 순간순간들이 새로운 모습이었던 것 같다. 그냥 무표정하고 있었을 때, 안에는 뭔가 뜨거운 것이 있는데 그걸 감추는 모습에서 감독님이 말한 새로운 얼굴이 보이지 않았나 싶다.”

-어떤 캐릭터를 만나도 실제 어딘가 있을 것 같은 인물을 만들어낸다.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면서 매번 그런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비결이 있다면.
“만약 진짜 어디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본인을 그렇게 허투루 표현하는 것에 대해 화가 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평면적인 사람 아니라고, 단순한 인물 아니라고 할 것 같아서 진짜 그 인물이 어딘가에서 살아서 내 연기를 보고 있다는 생각으로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 평가가 내겐 정말 좋은 칭찬이다.”

염혜란의 꽃길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찬란
염혜란의 꽃길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찬란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남다른 노력과 고민의 시간이 있었을 텐데, 연기를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지켜오고 있는 습관이나 다짐이 있다면.
“처음 시작할 때 좋은 가르침을 많이 받았다. 제일 많이 듣고 공부한 게 인물에 대한 접근 방식이었다. 극단 연우무대에 있었는데, 작품을 준비할 때 늘 인물의 전사를 생각하고 접근했다. 이 인물이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지 제일 많이 생각했던 것 같다. 그때 배웠던 것들이 내게 큰 자양분이 돼서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또 항상 선배들이 ‘나’로 접근해라는 말을 많이 했다. 말도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모든 이야기들이 나로부터 시작해야 가장 큰 울림을 주고 가장 큰 울림을 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을 줬다. 그 방식대로 접근하려 한다. 작품을 시작할 때 항상 노트를 사는 게 취미다. 노트에 인물에 대한 메모를 하는데,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의 일상은 무엇이었는지 어떤 사건일지 대본에 나와 있지 않은 인물에 대한 것을 채우는 작업을 한다. 연극할 때 다 배운 방식이다.”

-이번 작품을 하면서 노트에 가장 많이 적은 것은 무엇인가.
“영남이 희주에 대해 언제 어떻게 알았는지부터 시작해서 사건 전에는 어떤 삶을 살았고, 사건 이후엔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생각했다. 또 구체적으로 구축돼야 하는 것들이 있어서 사건이 있었던 날 영남이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나갔는지, 회사에서는 어떻게 지냈는지 구체적으로 적어봤다. 간병할 땐 어떤 부분이 가장 힘들었고, 그때 딸은 어떻게 키웠을까 지금의 일상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을까, 언제 나갔다가 언제 들어올지 영남이 없을 땐 남편을 누가 간호할 것인가 등 영남의 삶에 비어있는 부분을 생각하고 채워나갔던 것 같다.”

-염혜란에게 연기란 어떤 의미인가.
“어려운 질문이다. 내게 연기란, 내 안에 있는 많은 것들을 나로서 인정해가는 과정인 것 같다. 아직도 내 안에 얼마나 많은 다른 모습들이 있는지 발견을 다 하진 못했다. 많이 있다고 믿는 것도 연기의 과정인 것 같고, 그 많은 것들을 찾아가는 과정이 연기인 것 같다. 내 안의 여러 모습을 발견해나가는 과정.”

-‘염혜란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돌아보면 어떤가. 지금의 평가나 위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사람의 인생도 그렇고 배우의 인생도 그렇고 파동도 있고, 그래프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지금 상승세인가 보다. 그런데 항상 상승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힘들 때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으로 힘들 때도 버틸 수 있었다. 이 파도가 곡선이 있기 때문에 언제든 일이 없을 때도 있을 것이고 좋은 평가를 못 받을 때도 있을 것이고 작품이 좋아도 시청률이 낮을 수도 있을 거다. 그런 경우가 언제든 올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사실 지금이 조금 두렵기도 하다. 계속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오히려 노출이 많이 될수록 내가 가진 것들이 바닥나버리진 않을까, 들통나진 않을까 우려도 되고 그런 마음이다.”

-앞으론 어떻게 쌓아나가고 싶나.
“연극에서 배운 접근법을 시간이 없어서 단축하게 될 때가 있다.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해서 그때 노력보다 못하게 될 때 너무 불안하다. 했던 것들을 점점 줄여가게 되면 나중에 연기가 엉망진창이 될까봐 두렵다. 그래서 물리적인 시간이 없을수록 접근 방법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놓지 말아야 할 부분인 것 같다. 시간이 없으면 없는 대로 해야 하는 것들이 중요할 것 같고, 정말 안 되는 일이면 포기하는 순간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했던 방식들을 다시 점검해나가는 것, 결국 초심인 것 같다. 그리고 뒤돌아봐도 부끄럽지 않은 작품은 시청률이나 결과보다 과정이 부끄럽지 않은 작품이다. 내가 과정 중에 이렇게까지 노력을 했고, 그 노력이 성에 찼으면 좋은 작품으로 남는다. 앞으로도 성에 차게 노력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빛과 철’을 통해 받고 싶은 평가가 있다면.
“내게 참 소중한 작품이다. 배종대 감독이 정말 치열하게 지독하게 매달려서 정성스럽게 만들어냈다. 그 정성이 조금이라도 보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감독님의 그 기운을 받았다면 내 연기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염혜란도 지독하게 매달렸다는 것이 조금이라도 전해졌으면 하는 욕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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