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2019) 윤가은 감독은 촬영 현장에서 ‘9가지 수칙’을 만들어 아역배우들에게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하고자 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우리집’(2019) 윤가은 감독은 촬영 현장에서 ‘9가지 수칙’을 만들어 아역배우들에게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하고자 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시사위크=이영실 기자  “어린이와 성인이 서로를 믿고, 존중하고, 도와주고, 배려하는 것을 제1원칙으로 합니다. 어린이 배우들을 프로 배우로서 존중하며, 성인과 동등한 인격체이자 삶의 주체로서 바라봐 주세요.”

윤가은 감독이 ‘우리집’(2019) 촬영 당시 현장에 적용한 촬영 수칙 중 일부다. 데뷔작 ‘우리들’(2016)에 이어 ‘우리집’까지 아역배우들과 함께 작업하게 된 윤가은 감독은 현장에서 직접 느끼고 깨달았던 점을 토대로 ‘9가지 수칙’을 만들어 모든 스태프와 배우들이 지키도록 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린이 배우를 프로 배우로 존중하기 △머리 정리 등 신체 접촉을 할 때 미리 알리기 △촬영 준비를 충분히 할 수 있게 배려하기 △어린이 배우 앞에서 욕하지 않기 △외모가 아닌 행동에 대해 칭찬하기 △정해진 시간 내에 촬영 마치기 △건강 문제 인지하면 보호자 등과 공유하기 △이동 등 어떤 경우에도 혼자 두지 않기 △말과 행동에 모범 보이기 등이다. 아역배우들에게 보다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하기 위한 윤가은 감독의 배려였다.

많은 영화 현장에서 아역배우들을 위한 다양한 노력이 이뤄지고 있다. 가장 기본적으로 이뤄지는 것은 심리 상담이다. 영화 ‘클로젯’ ‘발신제한’ 배급사 CJ ENM 관계자는 “아역배우가 역할이나 극을 통해 심리적으로 영향을 받거나 문제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심리 상담 등 전문가를 통해 사전 준비부터 추후 관리까지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중에서도 ‘클로젯’ 현장은 더 특별했다. ‘아동 액팅 전문가’를 두고, 보다 체계적이고 전문적으로 아이들을 케어하도록 한 것이다. 아동 액팅 전문가는 아이들의 연기 지도는 물론, 심리적인 부분부터 안전까지 아역배우들과 관련된 모든 일을 관리 감독했다. 아이들과 성인 연기자, 제작진 사이 소통의 가교 역할도 하며 낯선 환경에서 아이들이 받을 수 있는 스트레스를 최소화하고자 했다.  

‘클로젯’과 ‘아이들은 즐겁다’(아래) 현장에서는 아역배우들을 전담 관리하는 전문가를 두기도 했다. /CJ ENM
‘클로젯’과 ‘아이들은 즐겁다’(아래) 현장에서는 아역배우들을 전담 관리하는 전문가를 두기도 했다. /CJ ENM

‘아이들은 즐겁다’ 현장에서도 오직 아이들만 전담해서 케어하는 ‘연기 커뮤니케이터’를 두기도 했다. 이지원 감독은 “아무리 신경을 써도 아이들이 방치되는 순간이 있는데, 아이들을 전담해서 케어해줄 수 있는 전문 스태프가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며 “아이들을 심리적으로 안정시켜주고, 안전을 위해 아이들을 돌봐주는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아역배우를 위한 안전장치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현장도 여전히 존재한다. 영화의 규모나 제작자의 성향에 따라 개인의 몫으로 돌리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 한 관계자는 “아무래도 제작비와 관련된 부분이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투자를 많이 하지 않으려고 하는 분위기도 있다”고 귀띔했다. 실제 취재 과정에서 한 제작사 대표는 “아이가 직접 액션 연기를 하는 것도 아닌데, 그런 게 꼭 필요하냐”며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현장에서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는 명확한 기준과 정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사)문화사회연구소가 지난해 11월 공개한 <대중문화산업 종사 아동·청소년 인권상황 실태조사>에 따르면, 미국‧영국‧뉴질랜드 등 해외에서는 1930년대부터 △아동·청소년 종사자의 노동시간 △학습권 보호 △보호자의 역할 △현장 학습교사 △임금 보호 장치 등 구체적인 보호 장치를 마련해오고 있다. 

특히 아동‧청소년의 인권‧안전‧복지를 위한 현장 전담 인력을 배치하는 것은 물론, 민감하고 정신적 트라우마를 건드릴 수 있는 장면을 아동과 연기할 때는 적절한 자격을 가진 심리학자나 치료사를 반드시 고용하도록 하는 등 정신적·신체적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건강을 살피고 악화를 방지하는 제도를 마련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2014년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의 보호’가 담긴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이 뒤늦게 제정됐다. 해당 법은 대중문화예술사업자가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과 계약을 체결하는 경우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 보호에 관한 사항’을 명시하도록 하고(동법 제7조 제1항 8호) ‘대중문화예술인의 △신체적·정신적 건강 △학습권 △인격권 △수면권 △휴식권 △자유선택권 등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는 조치를 계약에 포함해야 한다’고 규정했다.(동법 제21조). 

그러나 제작 현장에 적용 가능한 가이드라인은 누락된 상태로, 아동‧청소년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과 방안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또 상당 부분이 제작자의 재량에 맡겨져 있고, 구체적인 조치 의무를 부여하기보다 “협조해야 한다”는 수준으로 규정하고 있어 책임의 정도가 모호하고 실질적인 현장 적용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클로젯’에 아동 액팅 전문가로 참여한 조인표 감독은 “‘클로젯’은 좋은 환경이었지만, 그렇지 못한 현장도 많다”며 “해외에서는 아역들의 심리 치료를 반드시 함께 진행하도록 돼있다. 국내에서도 그런 제도적 지원이나 시스템이 자리 잡아서 더 많은 현장에서 아이들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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