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남의 빛과 그림자로 불리는 구룡마을. 강남 최고의 부촌으로 불리는 도곡동 타워팰리스와 불과 1km 정도 거리에 있지만, 구룡마을 주민들의 삶은 도심개발로 떠밀려온 지 30여년이 지나도록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다.

[시사위크=소미연 기자] 우려가 현실로 됐다. 서울시와 강남구의 의견차로 개발 착수가 지연돼왔던 서울 강남구 개포동의 구룡마을이 결국 도시개발구역 지정에서 해제됐다. 개발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만큼 서울시와 강남구는 재협상 가능성을 열어뒀으나 개발 방식을 둘러싼 양측의 주장엔 변화가 없어 현재로선 극적 협의를 기대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때문에 구룡마을 주민들의 불안감은 날로 커지고 있다. 기자가 13일 오후 구룡마을에서 만난 70대 A씨는 “기막히다”는 말로 복잡한 심경을 표현했다.

◇ “시한부 인생” 토로… 박원순 실망, 신연희 분노

구룡마을 주민들은 개발 무산으로 30년여 전의 악몽을 떠올렸다. 1980년대 도심개발에 떠밀려 구룡산과 대모산 자락으로 모여든 이들은 벽돌 한 장 얹을 수 없는 형편이라 두꺼운 비닐하우스 천과 비닐, 나무판자 등으로 집을 만들어 마을을 이뤘다. 판잣집을 마지막 희망으로 삼고 하나둘 모여든 사람이 현재 1200여 가구, 2500여 명에 달한다. 여름철에는 홍수로, 겨울철에는 태풍으로, 사시사철 위험이 도사렸지만 주머니마저 구멍 난 이들에겐 허름한 판잣집도 따뜻한 보금자리였다.

하지만 이들은 판잣집에서도 내쫓길 처지다. 개발이 무산되면서 토지주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 강남구 측에선 “토지주가 주민들의 정착을 사실상 허용한 만큼 구청에서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킬 수 있는 권한이 없다”고 밝혔으나 삶의 터전에서 한번 내쫓긴 경험이 있는 이들에겐 예측할 수 없는 미래가 슬퍼졌다. 구룡마을에서 20년 넘게 살아온 B씨는 “여기서도 쫓겨나면 어디 가서 살아야 할 지 모르겠다. 시한부 인생과 다르지 않다”고 토로했다.

▲ 구룡마을은 2012년 8월 도시개발구역으로 지정됐지만 서울시와 강남구가 개발방식을 두고 갈등을 빚다 결국 지난 4일 개발이 무산됐다. 때문에 “판잣집 생활을 청산하고 내 집 마련을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구룡마을 주민들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주민들의 허무한 마음은 박원순 서울시장과 신연희 강남구청장에 대한 야속함으로 변했다. 박 시장에겐 “실망감을 말로 다 할 수 없다”고 설명했고, 신 청장에겐 “주민들의 분노에 책임져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 구룡마을 주민 대다수는 개발 무산에 대해 신 청장의 ‘불통’과 ‘고집’으로 지적했다. “문제 해결을 위해 신 청장이 주민들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게 주민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사실상 서울시가 제시한 개발방식을 지지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남구와 협의를 이끌어내지 못한 박 시장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당초 서울시는 구룡마을을 공영개발하기로 확정하면서 땅을 토지주에게 100% 매입해 현금으로 보상한 후 개발하는 ‘100% 사용·수용방식’을 결정했다. 하지만 박원순 서울시장이 취임하면서 개발방식에 환지방식이 추가가 됐다. 개발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토지주들에게 일부는 땅으로 보상하겠다는 것. 이 같은 혼용방식이 아니면 거주민 전원이 안정적 재정착을 위한 임대주택 건설과 저렴한 임대료 책정 등을 위한 사업비 확보가 어렵다는 게 박 시장의 설명이다.

하지만 신 청장은 이를 반대했다. 환지혼영방식으로 개발할 경우 일부 토지주에게 과도한 이익이 돌아갈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실제 강남구에 따르면, 구룡마을 토지주 109명 중 약 300평 이상의 보유자는 44명에 달한다. 여기에 약 1000평 이상을 갖고 있는 토지주도 5명이다.

반대에 부딪힌 서울시는 구룡마을이 도시개발구역으로 지정된 후 2년여 동안 정책협의체를 운영하며 강남구에 수정계획안을 두 차례 제출했다. 환지 규모를 660㎡에서 230㎡로 줄이고, 1가구당 1필지 또는 1주택 공급 원칙을 담은 것. 그러나 강남구는 여전히 특혜 소지가 있다며 반려하고,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서울시의 환지혼용방식에 거부를 표시한 지난해 3월20일 이후 서울시와 SH공사의 정책협의 요청은 물론 시민단체 주도로 추진되던 공개토론회도 불참했다. 이에 대해 강남구 측은 “서울시가 계속 환지방식을 고집했기 때문”으로 설명했다.

▲ 구룡마을 개발을 둘러싸고 서울시와 강남구의 갈등이 검찰수사로 이어지면서 관망세를 보이던 토지주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손해배상 소송 등 법적 투쟁까지 각오해 강남구와 갈등을 예고했다. 이에 구룡마을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게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깊은 한숨을 쉬고 있다.
양측의 갈등은 강남구 측이 지난달 28일 구룡마을 비리 혐의로 서울시 전현직 공무원과 SH공사 직원 등 5명을 검찰에 고발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신 청장은 구룡마을 의혹이 검찰 수사로 명백히 밝혀질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서울시와 강남구의 갈등이 검찰수사로 이어지면서 구룡마을이 도시개발구역 지정에서 해제되자 관망세를 보이던 토지주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토지주 공동개발사업추진위원회는 13일 개발계획공모를 통한 준공영개발방식 개발 제안서를 강남구청에 제출했다. 서울시가 기존에 내세운 수용·사용방식과 환지방식을 함께 활용하는 안이다. 사실상 토지주들 역시 서울시의 손을 들어준 모양새다. 아울러 토지주들은 구룡마을 개발 무산에 대한 책임을 강남구로 돌렸다. “강남구가 서울시의 개발계획이 특정 토지주에게 혜택이 돌아간다는 이유로 반대해왔지만, 이들 토지주도 환지 받는 토지가 적다”는 것. 도리어 “매입가보다 토지가격이 올랐다는 것이 투기의 증거라면 강남구에서 땅을 소유한 사람 모두가 투기꾼이 된다”면서 “30년간 사유재산권을 유린하고 방치한 강남구가 토지주들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토지주들이 도시개발구역내 면적 78%의 동의를 받아 제안서를 제출, 법적으로 필요한 요건을 갖춘 만큼 강남구에서도 검토 후 3개월 내에 답을 줘야 한다. 도시개발법에 따르면 도시면적 3분의 2에 해당하는 토지주들이 동의할 경우 해당 지역의 도시개발에 대해 지자체에 제안할 수 있다. 이와 관련, 토지주들은 강남구에서 법적 근거 없이 반려할 경우 손해배상 소송 등 법적 투쟁을 불사할 방침을 세웠다.

◇ 생존권 요구 “우리도 세금 내는 강남구민”

문제는 토지주들이 내세운 준공영개발방식이 민영개발과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서울시와 강남구는 민영개발에 불가 방침을 내세우고 있는 만큼 토지주들의 제안은 거절될 가능성이 높다. 서울시도 “강남구가 제안서를 수용하고 협의 요청하면 논의할 수 있다”면서도 “공영개발이 아닌 민영개발 형태로는 힘들다”는 입장이다. “SH공사가 사업 무산 전까지 예비 사업자로 있어 민간에 사업권 주기 어렵다”는 것도 이유가 됐다.

서울시와 강남구, 여기에 토지주들까지 목소리를 내면서 정작 구룡마을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설 자리는 좁아졌다. 깊은 한숨에 구룡마을은 무거운 공기만 감돈다. 한 주민은 기자에게 주민등록증을 꺼내 보이며 지난 세월을 떠올렸다. 이들은 사유지 불법 점거를 이유로 30년 가까이 주민등록 등재가 거부되다 공영개발이 결정된 2011년 5월부터 주민등록증을 받을 수 있었다. 합법적인 거주민으로 인정받았던 그 때가 “행복했다”던 그는 “우리가 허황된 꿈을 꾸는 건가” 반문하며 “이제 우리도 세금을 내는 대한민국 국민이고, 강남구민이다. 우리의 생존권을 지켜줘야 한다”고 울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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