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권정두 기자] 지난 22일, 충남 아산시에 위치한 코닝정밀소재에서는 전에 없던 ‘사건’이 벌어졌다. 코닝정밀소재 노조 조합원들이 사측의 불성실한 교섭과 탄압을 규한하며 삭발식을 가진 것이다. 코닝정밀소재 노조가 설립한 지 약 1년 만에 처음으로 집단행동에 나선 순간이었다. 그동안 그들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신영식 코닝정밀소재 노조위원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 지난 22일, 코닝정밀소재 노조가 삭발식을 갖고, 사장실을 찾아가 성실 교섭을 촉구했다.
◇ 아무것도 몰랐던 직원들, 노조를 만들다

코닝정밀소재는 디스플레이 유리기판을 생산하는 회사로 지난해까지만 해도 ‘삼성코닝정밀소재’라는 간판을 달고 있었다. 지난 1995년 삼성디스플레이와 코닝이 합작 설립한 삼성코닝정밀소재는 이후 우리나라가 세계 LCD 시장을 이끌어나가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데 삼성디스플레이는 지난해 10월 23일, 삼성코닝정밀소재에서 손을 떼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삼성디스플레이가 보유 중인 지분 전체를 코닝에 넘기는 대신 7년 뒤 코닝 지분 7.4%를 확보해 최대주주로 올라서겠다는 계획을 밝힌 것이다.

당장 가슴에서 ‘삼성’ 명찰을 떼야할 상황에 놓인 직원들은 다소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특히 삼성이라는 이름을 보고 온 젊은 직원들의 혼란이 컸다. 직원들을 더욱 충격에 빠트린 것은 이런 중차대한 변화가 있었음에도 사전에 전혀 언질을 받거나 인지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에 일부 직원들은 노조 설립에 나섰다.

“무슨 거창한 투쟁을 하기 위해 노조를 설립한 것이 아니었다. 매각 결정은 경영진의 몫이라 할지라도, 최소한 노조가 있었다면 직원들이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진 않았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나이 먹은 직원이야 그렇다 해도, 젊은 직원들의 경우엔 나중에 또 어떤 일을 당할 지 알 수 없는 것 아닌가. 그게 결정적이었다. 최소한의 권리를 찾고 견제의 기능을 가져보자는 것이었다.” 신영식 코닝정밀소재 노조위원장의 말이다.

이후 지난 1월, 삼성디스플레이의 매각 절차는 모두 완료됐다. 다소 잡음이 일기도 했지만 코닝정밀소재에 남는 직원에 대한 위로금 문제도 합의에 이르렀다. 삼성그룹 계열사로 이동을 요청한 직원들은 현재 전환배치가 진행 중이며, 올해 말 안으로 마무리될 예정이다.

이처럼 삼성 간판을 뗀 코닝정밀소재는 별다른 문제없이 자리를 잡아갔다. 하지만 그 안에 자리한 코닝정밀소재 노조는 달랐다. 설립 1년이 다가오지만, 좀처럼 걸음마도 떼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 교섭은 제자리걸음, 노조 세력은 ‘와르르’

▲ 코닝정밀소재 노조.
코닝정밀소재 노조는 그동안 30여 차례에 걸쳐 사측과 교섭을 진행했다. 그러나 제대로 된 교섭은 해보지도 못했다는 것이 노조 측의 주장이다. 신영식 위원장은 “처음 10회차까지는 장소 문제로 갈등을 빚어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우리는 회사 내부에서 교섭할 것을 요구했지만 사측은 외부에서 할 것을 요구했다. 심지어 중국집이나 온천을 교섭 장소로 제안하기도 했다. 이에 우리는 노동청에 진정을 냈고 결국 한 번은 내부에서, 한 번은 외부에서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고 밝혔다. <관련기사 바로가기: ‘삼성코닝정밀소재, ‘장소’ 때문에 노사갈등 증폭’>

이어 “이후에 진행된 교섭에서도 어느 하나 진전된 것이 없다. 사측은 내용이 아닌 용어를 문제 삼는 등 교섭 해태를 계속했다”고 덧붙였다.

노사교섭이 제자리걸음을 계속하는 사이, 노조는 마치 바람이 빠지는 풍선처럼 맥이 풀렸다. 설립 초기 600여명에 달했던 조합원 수가 1년도 채 되지 않아 300여명 수준으로 반토막이 난 것이다. 노조는 조합원 수 급감 뒤에 사측의 악랄한 노조와해 전략이 있다고 주장했다.

신영식 위원장은 사측의 교묘하고 철저한 수법에 치를 떨었다. 우선 사측은 노조에 대한 회사 내부 여론을 악화시키는데 열을 올렸다고 한다. 여기엔 부서장급의 교육과 개인면담 등이 동원됐다는 것이 노조 측의 주장이다. 신영식 위원장은 “심지어 노조 간부들이 개인적인 욕심을 챙기기 위해 노조를 설립했다는 소문까지 냈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다. 이미 노조에 가입한 조합원들을 찾아 끊임없이 탈퇴를 종용하고 회유했다고 한다. 신영식 위원장은 “매일 아침 이메일 수신함을 여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노조를 탈퇴하겠다는 메일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그리고 다들 노조 탈퇴를 확인하는 답장을 반드시 요구했다. 알고 보니 노조 탈퇴가 일종의 ‘인센티브’가 된 것이었다”고 밝혔다.

결국 코닝정밀소재 노조는 지난 1월 사측의 조합원 탈퇴 종용과 관련해 노동청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조사를 벌인 관할 노동청은 지난 7월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이관했다. 현재 코닝정밀소재는 부당노동행위 혐의로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 삼성 떠났지만, 삼성의 무노조 정신은 ‘여전’

삼성의 ‘무노조 경영’은 굳이 부연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널리 알려져 있다. 그동안은 그 실체가 흐릿했지만, 지난해 ‘삼성그룹 노사 전략 문건’이 폭로되면서 무서울 만큼 ‘꼼꼼한’ 전략이 드러났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삼성 지붕 아래에 있었던 코닝정밀소재 역시 노조 대응 전략에 있어서는 프로나 다름없었다. 회사 이름은 바뀌었지만, 관리자들은 삼성 시절과 달라진 것이 없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신영식 위원장은 “정말 답답한 것은 사측의 방해 공작이 너무나 교묘해 그 실체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합원에 대한 회유와 협박, 노조를 흠집 내는 소문들 모두 정작 그 실체를 잡을 수가 없었다. 노무사에게도 정말 많은 자문을 구했는데, 결정적으로 늘 증거가 없다보니 속수무책이었다”며 “우리는 그야말로 급조된 ‘아마추어’ 노조였다. 그런데 우리의 상대인 회사는 그렇지 않았다. 완전히 프로였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기업노조의 한계를 느껴 산별노조를 고민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사측은 또 다시 이것을 여론 악화에 이용했다. 산별노조의 폐혜성과 사례를 집중적으로 직원들에게 교육한 것이다. 그러면서 ‘거봐라 쟤네들 산별로 간다고 하지 않느냐’는 식으로 노조의 진정성에 흠집을 냈다. 또 언론에 제보를 하면, 언론플레이를 한다거나 회사의 이미지를 깎아내린다며 노조를 깎아내렸다”고 덧붙였다. <관련기사 바로가기: ‘[단독] 코닝정밀소재, 내부 교육자료서 민주노총 폄훼 파문’>

또한 신영식 위원장은 “지금의 관리자들은 모두 삼성으로부터 무노조 정신을 체득했다. 지금도 그 정신은 삼성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삼성 간판을 떼긴 했지만, 삼성디스플레이는 코닝정밀소재의 최대 고객이고, 향후 최대주주가 될 것이다. 사업장 역시 딱 붙어있다. 삼성의 취지와 정신이 그대로 반영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 사측 관리자들의 노조 탈퇴 압박을 호소하는 코닝정밀소재 노조 조합원들의 제보.
◇ “끝까지 싸울 것”

신영식 위원장은 “처음엔 정말 이정도일 줄은 몰랐다”며 한숨을 쉬었다.

신영식 위원장을 비롯해 뜻을 함께한 조합원들은 직원들의 호응이 좋을 것으로 생각했고, 회사도 노조를 인정할 것으로 생각했다. 못해도 1년이면 노조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것으로 봤고,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겠다는 청사진도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신영식 위원장은 “초기에 직원들의 반응이 좋다보니 금세 조합원 1,000명을 넘기고 자리를 잡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너무 순진했고, 안일한 생각이었다. 순식간에 조합원을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지난 1년을 돌아봤을 때 무엇 하나 한 것이 없었다”며 씁쓸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 23일 진행한 삭발식은 이런 절박한 심정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는 “이제 정말 뭐라도 해야겠다 싶었다. 그래서 남아있는 300명의 삭발식을 할 테니 조끼를 입고 모여 달라고 연락을 돌렸다. 얼마나 올지는 알 수 없었고, 상관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모자 속에 감춰졌던 짧은 머리를 내보인 그는 “삭발식을 하고 사장실을 찾아가 제대로 된 교섭을 요구했다. 회사 입장에선 그야말로 초유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신영식 코닝정밀소재 노조위원장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이처럼 지나온 1년은 절망적이었지만,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신영식 위원장은 “사측의 감시와 압박에도 불구하고 삭발식에 참석해준 50명이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전에는 꿈에 부풀어 1,000명이 넘는 조합원을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정말 뜻을 같이 할 동료들이 있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삼성의 무노조경영에 익숙했고, 사측의 압박이 심하다보니 여전히 노조 활동을 두려워하는 직원들이 많다. 하지만 심리적인 지지와 지원도 결코 적지 않다. 아직 조합비를 걷지 못하는 상황이라 후원금을 부탁하는 글을 남겼는데, 금세 수백만원이 입금됐다. ‘의리’, ‘힘내세요’, ‘화이팅’ 등 실명 대신 응원의 메시지를 남긴 이들이 많았다”고 덧붙였다.

포기할 생각 역시 추호도 없다. 신영식 위원장은 “가끔은 나이 오십 넘어서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고, 그냥 고향에 내려갈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미 시작한 일 절대 포기할 수 없고, 끝까지 갈 것이다. 정말 이제는 철탑에도 올라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라며 결연한 각오를 드러냈다.

또한 그는 “젊은 후배들을 생각하면 결코 여기서 멈출 수 없다. 만약 노조가 힘을 갖추지 못하고 무너진다면, 그 젊은 직원들은 영원히 노조라는 꼬리표와 낙인을 떼지 못할 것이다. 반드시 제대로 된 노조를 세워서 그들을 보호하고, 정당한 권리를 찾고, 견제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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