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의 설문조사 결과 가장 만족도가 높았던 지급수단은 현금인 것으로 나타났다. <픽사베이>

[시사위크=현우진 기자] 경제사정이 여유롭지 않은 사람을 가리킬 때 종종 ‘지갑이 얇다’는 표현이 쓰이곤 한다. 여기에는 한 사람의 재력과 현금보유액 사이에는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는 사고방식이 깔려있다. 각종 카드와 전자화폐 등 다양한 결제수단이 통용되는 세상이지만, 한국은행이 최근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사회엔 아직도 ‘현금선호현상’이 뚜렷이 남아있는 듯하다.

◇ 전자거래 홍수 속에서도 “현금이 최고”

한국은행은 27일 ‘2017년 지급수단 이용행태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지급결제 관련 통계만으로는 금융소비자의 선호도와 이용현황을 파악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직접 설문조사를 통해 소비자의 의견을 수집하자는 취지다. 조사는 전국 만 19세 이상 남녀 2,511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지급수단으로서의 편리성과 안전성‧수용성‧비용을 기준으로 만족도를 평가한 결과 가장 많은 지지도를 얻은 것은 다름 아닌 현금이었다. 종합 만족도 82.1점으로 신용카드(78.0점)와 체크‧직불카드(74.5점)를 제쳤다.

다양한 전자상거래 수단이 등장하고 온라인쇼핑이 일상화된 최근 소비 트렌드에 비춰보면 다소 의아한 결과다. 한국은행의 연간 카드 이용실적 자료에 따르면 2017년 국내 신용카드 이용실적은 1조7,600억원에 이르며, 특히 개인 이용자의 실적 증가세가 가팔랐다. 체크카드 또한 2016년 대비 10% 늘어난 4,660억원의 이용실적을 기록하며 전년(15.2%)에 이어 높은 증가세를 이어갔다.

아직까지 한국사회에서 현금선호현상이 가시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전자상거래에 익숙하지 않은 노년층의 압도적인 지지가 가장 큰 원인으로 뽑힌다. 연령별로 지급수단에 대한 선호도를 조사한 결과 60대의 현금 선호율은 51.6%였으며 70대 이상에선 76.9%까지 높아졌다. 반면 20~40대의 현금선호율은 모두 한 자릿수에 그쳤다.

소비자가 원하는 지급수단과 상품의 공급자가 원하는 결제수단이 다르다는 점도 작용했다. 가장 선호하는 지급수단을 조사한 결과에서는 신용카드를 선택한 비율이 57.9%에 달했으며 현금은 23.3%, 체크‧직불카드는 18.0%로 만족도 조사와 다른 결과가 나타났다. 현금에 비해 지불속도가 빠르다는 점과 보관 및 관리가 편하다는 점이 카드가 강세를 보인 이유였다.

반면 현금은 해당 지급수단이 거절당하지 않을 확률을 나타내는 ‘수용성’ 항목에서 92.1점을 받으며 70점대에 그친 신용카드와 체크카드를 압도했다. 즉 결제 자체는 카드가 더 편리하지만(‘편리성’ 항목은 신용카드 1위‧체크카드 2위‧현금 3위) 공급자가 카드결제를 거부하거나 더 비싼 요금을 매길 가능성이 현금의 상대적 만족도를 높였다는 뜻이다.

◇ ‘동전 없는 사회’ 넘어선 ‘현금 없는 사회’ 가능할까

스웨덴과 캐나다, 중국, 일본은 '현금 없는 사회'에 가장 근접한 국가들로 분류된다. 사진은 현금결제를 받지 않는다는 내용의 일본 음식점 안내문. <뉴시스/NHK>

‘현금 없는 사회’는 아마 전 세계 모든 금융기관의 꿈일 것이다. 카드결제와 계좌이체, 모바일결제는 모든 거래내역이 전산망에 기록되는 만큼 유통경로를 파악하기가 현금보다 훨씬 용이하다. 더구나 동전과 지폐를 주조‧발행‧수거‧폐기하는데 소모되는 자원도 절약할 수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작년 한 해 동안 폐기된 손상화폐는 총 3조7,693억원에 달하며, 이들을 새 화폐로 대체하는데 617억원이 소모됐다.

대부분의 연구 자료들은 스웨덴을 ‘현금 없는 사회’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나라로 뽑는다. 스톡홀름에선 현금을 받지 않는다고 안내한 상점을 흔하게 찾아볼 수 있으며, 버스요금은 아예 현금 결제가 금지돼있다. 심지어 자선 잡지를 판매하는 노숙자나 유원지에서 헬륨 풍선을 파는 상점 주인도 카드 단말기를 들이미는 나라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스웨덴 성인의 99%는 현금 외 지급수단을 통해 거래한 경험이 있다(미국 92%‧한국 88%).

스웨덴이 제시하는 카드결제의 장점은 거래 속도가 빠르다는 점과 범죄 피해로부터 안전하다는 점이다. 전자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보안 사고에 대한 현금의 취약성은 한국에선 다소 과소평가되는 측면이 있다. 한국은행의 지급수단 이용행태 조사 결과에서 분실‧도난‧위조‧사기 등 보안 사고를 당했다고 응답한 현금이용자의 비율은 9.6%로 신용카드(7.0%)나 체크‧직불카드(4.6%)보다 높았다. 그러나 지급수단별 ‘안전성’을 조사한 설문조사 결과에서는 현금이 76.5점을 받아 60점대에 머무른 신용‧체크‧직불카드보다 높은 점수를 획득했다. 실제 피해사례가 보안성에 대한 이미지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아시아는 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현금선호현상이 강하게 남아있는 지역으로 인식된다. 특히 중국과 일본은 안전자산에 대한 욕구가 높고, 지폐와 관련된 미신이 깊어 현금을 가장 좋아하는 국가로 뽑힌다. 그러나 해외 시장리서치업체 ‘포렉스 보너시스’가 작년 발표한 바에 따르면 중국은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현금 없는 사회’에 가까이 다가간 나라다. 전자거래 관련 6개 지표를 합성해 제작된 이 순위에서 중국은 지난 5년간 현금 외 결제액의 증가속도가 가장 빠른 국가이자 모바일결제에 대한 인식률이 가장 높은 국가로 나타난다. 선진국 중 현금결제비율이 가장 높다는 일본도 1인당 3.3장에 달하는 직불카드 보유율을 앞세워 9위에 올랐다.

현금을 대하는 한국의 얼굴은 양면적이다. 노령인구와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현금선호현상이 뚜렷하고, 카드로 결제하는 고객에게 더 높은 액수를 부르는 자영업자들의 행태가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했다. 반면 젊은 층에서는 전자거래에 대한 선호도가 압도적으로 높으며(30대 신용‧체크‧직불카드 선호도 94%) 한국은행은 ‘동전 없는 사회’ 사업을 통해 화폐유통비용을 절감하려 시도하고 있다. ‘믿을 건 현금뿐’이라는 오랜 경구가 한국사회에서 언제까지 통용될지는 더 지켜봐야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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