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범.
80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
전 중앙일보 정치부 부장대우
전 국방홍보원장

최근 국내 유력 일간지에서 통일에 관한 장문의 글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글쓴이가 과거 정부에서 통일부 차관을 지낸 전문가라서 더욱 그랬다. 2.27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결실 없이 무산된 데 따라 보수적인 시각이 이렇게 표출된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통일 배제한 한반도 평화는 궤변이고 반역이다’라는 큼지막한 헤드라인처럼 그의 글은 기본 전제가 잘못된 가운데 논리적인 비약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2019.3.22, 중앙일보, ‘김천식의 한반도평화워치’)

글쓴이 김천식 전 통일부 차관은 이 글에서 문재인 정부가 마치 통일 포기선언이라도 한 것처럼 격앙된 톤으로 정부의 대북정책을 시종 준엄하게 꾸짖었다. 

그는 “우리가 통일을 하지 말자고 주장하면 한반도 통일은 없다”거나 “우리가 통일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은 더는 대한민국이 아니다”라며 마치 정부가 통일을 포기했으며, 그런 사실을 국민 모두가 익히 잘 알고 있는 기정사실처럼 못을 박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이 성립되려면 최소한 문재인 정부가 ‘이러저러한 이유로 통일을 하지 않기로 했다’고 국민 앞에 공표한 사실 정도는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위 문장이 논리적인 인과관계로 연결이 된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가 언제 통일을 하지 말자거나 포기한다고 밝힌 적이 있기나 했던가? 이쯤 되면 비약을 넘어 심한 왜곡이 아닐 수 없다.   

가정법을 사용한 위 문장을 쉽게 풀어 쓰자면 ‘문재인 정부가 이렇게 통일을 추구하지 않으니 우리는 더 이상 대한민국이라고 말할 자격도 없게 됐다’는 자조적이고 자기비하에 가까운 넋두리로 들릴 수도 있다. 상대방이 하지도 않는 말을 전제로 설정해 놓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궤변에 가까우며, 고약하기까지 하다.  

그는 마침내 ‘통일 포기론’으로까지 논리를 비약시키고 있다. 그러면서 이를 일제시대 ‘독립 포기론’에 빗대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그 둘은 “정신과 논리구조가 똑같고 분명 반역”이라며 극단적인 언어사용까지 감행했다. 참으로 놀라운 발상이다. 말이 좋아 반역이지 바꿔 말하자면 ‘이적행위’라는 것 아니겠는가. 통일을 포기한 적이 없는 현 정부에게 일제시절 소수 친일파들의 독립 포기론을 똑같은 반열 위에 등치(等値)시키는 것부터가 현 정부의 통일정책을 두 번 죽이는 부관참시나 다름없지 않을까.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은 한마디로 ‘새로운 한반도 체제 구축’라고 말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을 이틀 앞둔 2월 25일 “한반도 운명의 주인은 우리”라며 앞으로 신(新) 한반도 체제를 준비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후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우리는 지금 식민과 전쟁, 분단과 냉전으로 고통 받던 시간에서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주도하는 시간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우리 손으로 넘기고 있다”며 “역사의 변방이 아닌 중심에 서서 전쟁과 대립에서 평화와 공존으로, 진영과 이념에서 경제와 번영으로 나아가는 신 한반도 체제를 주도적으로 준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 정부 대북정책의 뼈대와 철학을 알 수 있는 이날 발언에서 통일을 포기하거나 평화공존에만 매몰돼 있다고 단정할 수 있는 대목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그는 현 정부가 통일을 포기했다는 어떤 증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그저 ‘통일은 선(善), 평화는 악(惡)’이라는 이분법 논리로 정부를 몰아붙이고 있다.

그동안 문재인 정부가 추진해 온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과 북한 비핵화, 평화협정과 종전선언, 9.19 남북군사합의 등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통일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로드맵이 아니고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평화를 얻기 위해 통일을 거부하거나 포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김 전 차관은 문재인 정부가 확고한 통일의지는 내팽개친 채 값싼 평화놀음이나 벌이고 있는 것처럼 누차 강조하고 있다. 

김 전 차관은 기고문에서 “통일을 추구하는 것이 남북 간 불신과 갈등의 근원이고 한반도 평화를 해친다는 주장은 참으로 해괴하다”고 말한다. 그는 통일과 평화가 마치 대립·갈등관계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통일 전문가의 발언으로는 믿기지 않는다. 평화 없는 통일은 상상할 수 없고 불가능하며, 그것은 상식 중의 상식이다.

그는 독일의 경우를 예로 들었다. 분단 시기 서독은 한 번도 통일의지를 포기한 적이 없었고, 동·서독이 특수 관계를 유지했지만 상호 교류가 활발했으며 평화가 파괴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또 “하나의 국가를 지향하는 ‘특수관계’가 평화를 해치는 반면 남북관계를 ‘국제관계’로 보는 것이 한반도 평화 정착에 유리하다는 주장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지적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것을 누가 부인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백 번 맞는 말이다. 하지만 누가 그렇게 말했는지를 밝히지 않는다면 특별한 의미가 없다. 이 또한 흑백논리요 언어의 유희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까지 서독은 ‘통일’이라는 말을 가급적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통일을 포기해서가 아니라 통일을 간절히 염원했기 때문에 단어 하나에도 극히 조심스런 태도를 견지했던 것이다. 서독은 말 보다는 언젠가 통일에 유용한 ‘통행증협정 체결’ 같은 작은 실천(Kleine Schritte)들을 하나씩 축적하면서 동독과의 다각적인 교류협력을 확대, 지속해 나갔다. 

아데나워의 서방정책과 브란트의 동방정책, 뒤 이은 헬무트 콜의 독일정책이 중단 없이 이어진 결과 마침내 통일에 다다를 수 있었다. 화려한 말잔치 보다는 평화 다지기에 긴요한 작은 실천들이 독일통일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이다. 이를 두고 김영희 전 중앙일보 대기자는 “평화의 과정을 건너 뛴 박근혜 정부의 통일 대박론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고 말한다.(‘베를린 장벽의 서사’, 2016. 6, 창비)

대한민국 역대 어느 대통령도 통일을 자기 마음대로 포기한 적은 없었다. 그것은 헌법사항이기 때문이다. 대통령 취임식 날 당선자는 취임 선서문을 낭독한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 국민의 자유와 복리증진,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이렇듯 ‘조국의 평화적 통일’은 대한민국 헌법이 정해 준 대통령의 가장 기본적인 책무 가운데 헌법준수 다음 가는 중대한 책무다. 만약 문재인 정부가 통일을 포기하는 쪽으로 정책을 선회한다면 그는 취임식 때 국민 앞에 낭독한 취임선서를 위반한 혐의 하나만으로도 야당으로부터 당장 탄핵 위기에 몰리게 될지도 모를 것이다. 

지금은 요란하게 통일을 외치기보다는 평화를 굳건히 다져나가는 내실 있는 실천들을 하나하나 축적해 나갈 때라고 본다. 그렇게 충분한 기간 동안 평화가 뿌리를 내릴 때 비로소 그 위에 통일의 새 싹이 틀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 통일이 무성할 때 오히려 전쟁의 먹구름이 엄습했던 기억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저작권자 © 시사위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