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겸 칼럼니스트
하도겸 칼럼니스트

광화문에서 촛불시대를 열었던 우리는 세계의 유례없는 무혈 혁명을 성공시켰다. 이런 자랑스러운 민주 시민으로 급성장한 우리는 홍콩을 비롯한 민주화를 열망하는 세계의 여러 국가의 벤치마킹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세계인들이 열망하는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들의 일상은 그리 민주적이지 못한듯하다.

광화문이라는 '장'이 마련되어 지금도 다양한 목소리가 울려 나온다. 물론 일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모임도 있다. 가끔 폭력성이나 소모성을 넘어 소음에 불과하다는 비난도 받지만 그렇게 단기적인 시각에서 보는 것이 오히려 덜 민주적이지 않을까 싶다. 누구나 자유롭게 발언할 그런 기회가 드디어 왔다는 것만으로 이미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에 성큼 다가왔다.

좀 이색적인, 좀 안타까운 주장들 역시 짧지 않은 어쩌면 아득한 시간을 거치면 정제되어 민주화의 꽃을 피우는데 좋은 밑거름이 될 것이다. 지난 근현대사가 말했듯이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모두 의미가 있다는 취지의 유명 가요 가사처럼 모든 게 과정이니 긴 안목으로 그리고 긴 호흡으로 지켜봐야 할 것이다. 어떤 운동이든 시간을 지나 새로운 지도자나 계기를 만나면 처음과 달리 참으로 훌륭한 성장을 이룰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광화문은 이런 다양한 목소리가 허용되는 민주화의 장이 되었다. 하지만 같은 시기, 아니 촛불혁명을 한참 지난 오늘의 우리의 집과 직장은 어떤가? 촛불을 들고 광화문을 메운 우리 국민들은 물론 지금도 광화문에서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 또는 직장으로 출근하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이기주의자로 돌변한다.

사진은 요즘 우리나라에 만개한 무궁화 꽃이다. / 하도겸 칼럼니스트
사진은 요즘 우리나라에 만개한 무궁화 꽃이다. / 하도겸 칼럼니스트

밖에서는 소통과 대화를 요구하면서도 자신의 시간과 돈을 들여 희생하며 정의사회의 구현을 외쳤거나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광화문에서 벗어난 시점에는 '돈'이나 '이익' 앞에서는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 금권주의의 노예로 돌변한다. 집이나 직장에서 조금도 손해 보려고 하지 않는 갑질 인간이 과연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었던 사람인가 의심스럽기 그지없을 뿐이다.

갑질까지는 아니더라도 동료 간이라도 아무리 옳은 이야기를 해도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여기면 전혀 무시하며 그 순간 정의는 일말의 가치도 없다. 전혀 배려도 하지 않고 경청이나 공감은 별천지 즉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이야기로 치부한다. 광화문에서 소리 높여 외친 정의로운 사회나 인간 존엄에 기반한 인권은 공허한 메아리일 따름이다. 자신들의 일상적인 삶에서는 그 흔적이나 자취조차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중적인 모순이 용납된다는 것 자체가 촛불 민주혁명 시민으로 정말 '양심' 있는 모습일까 하는 근본적인 의문을 스스로에게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급성장된 민주시민 의식에 안과 밖이라는 이중적인 모습이 자화상이 되는 것 자체가 정의롭지 못하다. 철저한 자각 위에서 '정의'에 대한 생각을 안과 밖에서 일치화시키지 않으면 촛불의 정신이 훼손되는 것은 물론 민주주의 존립 자체가 위험해질 수 있다.

이제 광화문만 민주화의 장으로 할 것이 아니다. 집의 식탁이나 거실 그리고 직장의 회의실이나 휴게실에서 어둠을 밝히는 촛불을 누구보다도 먼저 켜서 스스로가 있는 그곳에 민주주의가 꽃피는 협치의 장이 되어야 한다. 이런 시대적 요구를 인지하고 받아들여서 우리가 문화 전성기를 구가하는 지금 향후 새로운 천년을 만드는 데 동참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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