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장

한여름 폭염 속에 형성된 남북관계의 냉기류가 심상치 않다. 신호탄은 지난 25일 강원도 원산에서 쏘아 올려졌다. 여름 휴양 차 이 곳의 특각(전용별장)에 체류한 것으로 파악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인근 호도반도 지역에서 발사된 사거리 600km의 미사일(러시아제 이스칸다르 개량형) 2발의 발사를 참관한 것이다. 북한은 지난 5월에도 두 차례 미사일 도발을 감행했다. 이번 추가 도발에 대한 우려가 일각에서 대두했지만, 청와대와 정부·군 당국은 그리 대수롭게 여기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기 시작한 건 이튿날 북한 관영매체의 관련 보도가 나오면서다.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발사 관련 영상과 김정은 참관 장면을 공개하면서 ‘위력시위사격’이란 표현을 섰다. 또 김정은이 “우리는 부득불 남쪽에 존재하는 우리 국가안전의 잠재적, 직접적 위협들을 제거하기 위한 초강력 무기체계들을 줄기차게 개발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한 대목을 전했다. 특히 중앙통신은 말미에 “남조선 당국자는 오늘의 평양발 경고를 무시해버리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의 보도 내용을 토대로 분석해보면 김정은 위원장은 첫째, 대남 선제타격의 가능성을 열어둔 것으로 보인다. ‘잠재적 위협’ 제거라는 명분 아래 미리 예방타격 형태의 도발을 할 수 있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한국과 미국의 전매특허가 아니란 시위다. 둘째, 모종의 위협성 경고를 문재인 대통령에게 보낸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통상 김정은이 등장하는 상황에서 단수 형태의 ‘남조선 당국자’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의미한다. 비록 김정은이 직접 워딩을 하는 형태는 아니었지만 대남 위협 발언 직후에 관영매체가 대통령을 지목해 ‘경고를 무시 말라’고 언급한 건 사실상 김정은의 발언과 진배없다고 볼 수 있다.

겉으로 표현하거나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청와대와 정부는 무척 곤혹스러운 분위기다. 문재인 대통령의 여름휴가 취소도 악화일로의 한일 관계나 경제문제 뿐 아니라 남북관계 악재의 돌출에 따른 변수도 만만치 않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북한의 이번 도발과 김정은의 위협성 발언이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상당 기간 파상공세 형태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문 대통령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 정부의 5만톤 규모 대북 식량지원 제안에 대해서도 북한은 거부의사를 분명히 하는 등 남북관계의 차단벽을 높이는 상황이란 점에서다. 북한의 식량난이 심상치 않다는 국제기구의 호소가 나왔고, 북한도 전방위로 식량 조달에 나선 상황에서 “남조선 것은 안 받겠다”고 하는 배경이 무엇일까 하는 점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김정은과 북한의 도발적 행태는 표면적으로 8월 초 시행 예정인 한미연합군사훈련 ‘19-2동맹’과 한국의 F-35A 스텔스 전투기 도입에 따른 반발로 나타난다. 하지만 최근 대남 이슈와 관련한 북한 측의 일련의 행보를 되짚어보면 그런 단순한 수준의 불만표출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집요한 대남 이슈몰이가 진행되는데다 문재인 대통령까지 겨냥해 집중적인 비난과 위협성 발언이 퍼부어지고 있다는 점에서다. 8월이 지나면 자연스레 분위기가 누그러지고 남북관계의 복원이 추진될 것이란 청와대와 대북부처 당국자들의 안일한 관측과는 다른 차원에서 사태가 진행되고 있다는 해석이 전문가 그룹에선 힘을 얻고 있다.
 
자칫 김정은이 핵과 미사일 도발에 치중하면서 ‘워싱턴 타격’과 ‘서울 핵 불바다’를 위협하던 2017년 11월 이전의 상황으로 회귀할지 모른다는 우려도 나온다. 같은 해 5월 대통령에 취임한 문재인 대통령은 북한의 연이은 미사일 도발에 대처하기 위해 분주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대북접근을 통해 개성공단 재가동 같은 유화조치와 남북관계 복원을 통해 이명박·박근혜 정부와의 차별성을 보여주려 했지만 정세가 만만치 않았다. 북한의 미사일 도발이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자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일주일 만인 그해 5월 17일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를 방문해 “우리 군은 적의 어떠한 도발도 용납하지 않고, 적이 무력도발을 감행한다면 즉각 강력히 응징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김정은 정권을 거의 직접적으로 ‘대한민국의 적’으로 지목한 것이다.

물론 상황은 반전됐다. 지난해 2월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김정은 위원장이 대남 특사파견과 정상회담 제안을 해왔고,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해 3차례의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또 지난 6월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함께 남북 정상이 판문점에서 회동하는 역사적인 이벤트도 벌였다. 일련의 과정에서 김정은은 문재인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와 환대를 받았다.

지난해 6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이 북측의 사전 기싸움과 트럼프의 ‘회담 취소’ 카드로 무산 위기에 처했을 때도 김정은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판문점 만남을 긴급 요청했고 한국의 중재로 김정은-트럼프의 첫 만남이 성사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김정은 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과의 만남에서 ‘평양 냉면’ 발언이나 ‘교통 불비’ 고백을 통해 진솔한 속내를 드러내고 교감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런 정황에 비춰보면 김정은과 북한의 도발과 위협성 발언 배경에는 단순한 몽니 차원을 넘어서는 근본적 문제가 자리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문을 낳는다. 이미 지난 4월 김정은이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을 통해 문재인 대통령을 “오지랖 넓은…” 운운하며 비난했고, 이후 남북관계는 회복되지 못한 채 때 아닌 냉각기를 보내고 있다. 6월 말 판문점 남북미 회동 며칠 전에도 북한은 문재인 대통령의 중재역할에 극렬한 비난을 퍼부어 그 이유가 뭘까 하는 대목에 관심이 쏠리기도 했다.

북한 당국이 아닌 김정은이 무척 서운해 하거나 문재인 대통령과 대면하기조차 싫을 정도의 사단이 생겼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적어도 지난 이른 봄 남북 간 비공개 채널을 통한 협상이나 소통 과정에서 북측이 문재인 정부가 수용하기 어려운 무리한 요구를 해왔고, 이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서 남북 당국관계도 꼬였을 수 있다는 것이다.

상식을 넘어서는 남북 정상 간의 파열음이나 냉랭한 분위기는 쉽게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중요한 건 북한과 3차례의 정상회담을 한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으로부터 ‘경고’ 운운하는 메시지를 받을 정도로 남북관계가 꼬였다는 점이다. 단순한 불만표출이나 벼랑 끝 전술이라 여기거나 8월 군사훈련이 지나면 다시 회복 궤도에 오를 것이란 희망적 기대는 금물이다.

최악으로 치닫는 한일관계와 중국과 러시아의 발호는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한반도 정세를 더욱 난이도 높은 고차방정식으로 만들어 버렸다. 남북 간 공개 회담이나 기싸움의 이면에서 어떤 비밀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알 수 없고, 저간의 사정이 공개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게 분명하다. 단단히 꼬인 매듭을 풀지 않는다면 남북관계의 냉각기는 생각보다 훨씬 길어질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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