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다난(多死多亂)’
올 한 해 재계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아마도 이럴 것이다. 글로벌 경기침체와 더불어 경제민주화와 관련된 전방위적 압박으로 인해 주요 기업들은 쉽지 않은 한 해를 보냈다. 특히 재벌그룹들은 어느 해 보다 우울한 한해가 됐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시작된 ‘군기잡기’로 굴지의 대기업들이 상당수 벼랑 끝으로 내몰려서다. 유명한 그룹 총수들이 줄줄이 쇠고랑을 차게 됐고, 상당수 대기업들은 사정 칼바람으로 인해 초토화되다시피 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서초동으로 향하는 총수들의 모습이 신문지면과 방송화면을 채웠고, ‘압수수색’이란 단어 역시 익숙해질 정도로 빈번하게 소식을 전했다. 이 때문에 재계, 특히 재벌가는 ‘다사다난(多事多難)’이 아니라, ‘다사다난(多死多亂)’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시사위크>에서는 올해 유난히도 혹독한 한해를 보낸 재벌가의 수난사를 들춰봤다. 

 
▲ 계열사 자금 수백억 원을 빼돌린 혐의로 기소된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1월 31일 오후 선고를 받기 위해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 들어가고 있다.
[시사위크=정소현 기자] “제가 무엇을 제대로 증명 못 했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정말 이 일(횡령)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일에 전혀 관련되지 않았고 이 일에 대해 전혀 모릅니다. 다른 건 몰라도 꼭 말하고 싶은 것은 단지 그것뿐입니다.”

지난 1월 31일, 회사 자금을 횡령한 혐의로 기소된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법원으로부터 ‘징역 4년과 법정구속’을 선고받았다. 재판부가 선고를 마치고 발언 기회를 주자 최 회장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이 같이 말했다. 억울함이 가득담긴 목소리였다. 사실 어느 누구도 최 회장의 실형을 예측하지 못했다. 그 때문일까. 최 회장은 이날 마지막 발언을 하면서 눈물을 보였다.

올해로 꼭 10년.  지난 2003년 SK글로벌 분식회계 사건으로 구속돼 수감생활을 한 바 있는 최 회장은 꼭 10년만에 다시 옥살이를 하는 수모를 겪고 있다. 최 회장은 지난 1월 31일, 계열사 자금 횡령 등의 혐의로 1심 재판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아 법정구속돼 현재 서울구치소에 수감중이다. 벌써 11개월째다.

최 회장은 지난 2008년 10월 동생인 최재원 부회장과 공모해 SK텔레콤, SK C&C 등 계열사들이 창업투자사 베넥스인베스트먼트에 투자한 돈 중 497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기소됐다. 또한 2005년부터 2010년 사이 계열사 임원들에게 성과급을 과다 지급한 후 돌려받는 방식으로 받은 약 140억원을 비자금으로 사용한 혐의도 받았다.

다만 법원은 최 회장의 성과급 과다 지급 및 비자금 조성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로 판결했다. 함께 재판정에 선 최재원 부회장의 계열사 자금 횡령 혐의에 대해서도 “관련 진술의 신빙성이 없다”고 무죄를 선고했다.

◇ 10년과는 전혀 다른 처지

사실 이번 사건은 지난 2003년과 비교하면 금액적 측면에서 훨씬 적다. 당시엔  1,000억원대의 배임혐의를 비롯해 1조5,000억원대의 분식회계 혐의까지 덧붙여졌다. 최 회장은 그러나 그때보다 더 큰 고초를 치르고 있다. 1심과 항소심 재판부는 모두 그에게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했고, 최 회장은 해가 바뀌는 현재까지도 서울구치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재계에서는 정권이 바뀐 후 재계를 대하는 대한민국 사법부의 태도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적한다. 실제 박근혜정부 들어 재벌 총수에 대한 엄벌이 천명되고, 구속된 총수에 대한 사면이나 보석 등 솜방망이 처벌에 대한 비난여론이 거세지면서 실형을 고스란히 살아야 하는 상황이 됐다. 더군다가 최근 재벌 총수에 대한 선고는 실형 일변도다.

이런 분위기는 최 회장의 옥살이를 더욱 암울하게 하고 있다.

최 회장은 대법원의 파기환송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다.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되기 보다는 파기환송으로 형을 줄일 수 있는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이다.

특히 구속상태에서 공판받을 경우 형사소송법은 통상 1심 6개월, 항소심 4개월, 상고심 4개월 동안 구속할 수 있다. 최 회장의 상고심은 지난 11월 대법원 1부에 배당됐다. 구속 만기일이 지나도 대법원이 판단을 내리지 않으면 SK 측은 보석을 신청할 수 있다. 최 회장의 동생인 최재원 부회장은 1심에서 구속기소됐다가 구속만기가 지나 지난 6월초 보석으로 나온 바 있다.

지난 여름부터 재계와 언론을 통해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는 ‘허리통증설’ 역시 수상하다. 최 회장은 현재 심각한 허리통증을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구속 전부터 허리가 좋지 않았는데, 오랜 수감생활을 하면서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상태가 악화됐다는 것이다.

▲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1월 31일 오후 법원으로부터 징역 4년을 판결받고 법정구속된 가운데 서울 종로 SK본사 앞으로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그룹 측에서는 괜한 오해라도 생길까 싶어 상당히 말을 아끼고 있지만, 그간 상당수 재벌 총수들이 수감 생활 중 ‘병’이나 건강악화를 이유로 특혜를 노린 사례들을 감안하면 추후 최 회장 측의 행보에 따라 이 역시 좋은 ‘명분’이 될 지도 모른다는 게 호사가들의 지적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10년 전 ‘행운’이 따라 줄지는 의문이다. 최 회장은 2003년에도 SK글로벌 분식회계 사건으로 구속됐다가 7개월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이 사건과 관련, 최 회장은 2008년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가 석 달 만에 광복절 특사로 사면된 바 있다.

최 회장에 대한 대법원 판결은 2월 전후에 이뤄질 전망이다.

10년전과는 너무도 다른 상황을 맞고 있는 최태원 SK그룹 회장. 과연 악몽같은 한 해를 보낸 최 회장에게도 봄날이 올 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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