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대 국회에서 발의됐으나 폐기된 법안이 1만5,000여건에 달한다. 이 중에는 법안이 통과될 충분한 근거를 갖고 있지만, 결국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21대 국회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처럼 많은 법안이 국회에서 잠자는 이유는 이해당자들간의 첨예한 대립 때문이다. 일부 법안은 이해당사자들의 물밑 로비로 논의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폐기되기 일쑤다. <시사위크>는 국회에 계류된 법안이 왜 처리되지 못했는지 그 과정을 쫓고자 한다. 법안이 발의된 배경과 국회에서 왜 잠만 자야 하는지를 추적했다. [편집자 주]

음주 등으로 일부러 심신장애를 야기한 범죄자들의 감형 제도를 바꾸기 위한 개정안이 여러 차례 발의됐으나, 한 번도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사진은 국회의사당 앞 신호등이 일제히 빨간불인 모습. 
음주 등으로 일부러 심신장애를 야기한 범죄자들의 감형 제도를 바꾸기 위한 개정안이 여러 차례 발의됐으나, 한 번도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사진은 국회의사당 앞 신호등이 일제히 빨간불인 모습. 

시사위크=서예진 기자  현행 형법 제10조 2항은 심신장애 상태에서 사물을 변별할 능력과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 범죄를 저질렀을 때 형을 감경해주도록 규정하고 있다. 심신장애를 야기하는 원인은 여러 요인이 있지만, 통상적으로 알려진 것은 음주나 약물로 인한 것이다. 여기서 나온 게 ‘주취감경’이다. 

이 ‘주취감경’(혹은 주취감형)은 사회에서 이슈가 될 때마다 폐지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다. 사회적 공분을 산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의적으로 음주·약물을 섭취해 심신상실 상태를 만들고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감형을 받을 수 없도록 하는 법안이 여러 차례 발의됐지만 통과되지 못했다. 대체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 ‘심신장애자 감형’ 제정 이유

문재인 정부에서 운영했던 ‘청와대 국민청원’에도 주취감경 폐지가 올라온 바 있다. 당시 청원의 주요 골자는 ‘주취감형 폐지 및 조두순 출소 반대’였다.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11시 50분 청와대입니다’에 출연해 이에 대해 답변한 바 있다. 청원에 언급된 두 주장 역시 현실적으로 당장 이뤄지기 어렵다는 게 답변의 주요 내용이었다. 

조 전 수석은 답변에서 “형법상 주취감경 조항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감경사항과 함께 규정하고 있어, 규정 자체를 삭제하는 것은 신중한 논의가 필요하다”며 “아예 음주를 심신장애 범주에서 제외하는 입법 논의가 이뤄질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법률에 ‘음주를 한 경우 감경한다’고 규정돼 있는 것은 아니다. 음주로 인해 사물을 변별할 능력과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상실됐을 것으로 판단했을 때 형을 줄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애초 ‘심신상실’ 상태를 감형의 대상으로 삼았는지에 대해 알아봐야 한다. 

형법은 개인에게 형벌을 부과함에 있어 책임주의 원칙을 따른다. ‘책임주의’란 ‘범죄에 책임이 있는 자에게 형벌을 부과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책임 없는 자에게 형벌을 부과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주취감경과 마찬가지로 여러 차례 논란이 된 ‘촉법소년’ 역시 책임주의 원칙으로 인해 형벌의 수위가 달라진 사례로 볼 수 있다. 

그러니 불법임을 인지할 수 있는 상태(사물을 판단할 능력)도 아니고, 자신의 행동을 제어해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상태(의사를 결정할 능력)도 아닌 심신장애자는 범죄의 책임을 온전히 져서는 안 된다는 게 형법 10조가 만들어진 취지다. 이것은 형법의 책임주의 원칙에 입각한 것이다. 

법조계가 해당 법안의 개정을 반대한 것은 섣부른 개정을 통해 형법의 근간인 책임주의 원칙을 해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 / 게티이미지뱅크
법조계가 해당 법안의 개정을 반대한 것은 섣부른 개정을 통해 형법의 근간인 책임주의 원칙을 해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 / 게티이미지뱅크

◇ 법조계, 신중한 접근 요구

자의적으로 음주·약물을 섭취해 심신상실 상태를 만들고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감형을 받을 수 없도록 하는 법안이 여러 차례 국회에서 발의됐어도 그동안 통과되지 않았다. 법조계에서 반대 의견이 높았기 때문이다. 형법의 근간인 책임주의 원칙이 있으니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렇다고 음주에 온정적인 처분을 내리자는 것은 아니라는 게 법조계의 입장이다. 

이 때문에 서영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형법 일부개정법률안’(형법 10조 4항을 신설) 역시도 책임주의 원칙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 개정안의 골자는 음주나 마약류에 의한 심신장애자는 형을 감경하는 규정을 적용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관계자는 “이 개정안의 경우 음주나 마약류로 인한 심신장애 상태를 스스로 야기했는지 여부나 그 당시 범행을 예견할 수 있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모두 필요적으로 책임감경을 배제하고 있다”며 “이는 양형 단계에서 행위태양(행위의 양태)이나 심신장애의 원인·정도에 따라 구체적 타당성을 기하기 어렵고 책임주의 원칙에 위배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범죄자가 술을 자의적으로 마신 것인지, 또 범죄를 염두에 두고 술을 마신 것인지 여부 등을 따지지 않고 일괄적으로 감경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판사의 재량권을 없앴다는 뜻이다. 이는 재판부가 행위의 형태나 범주, 그리고 얼마나 취했는지, 왜 음주를 하게 됐는지 등을 판단해 형을 정하기 어렵게 만들고, 범죄 책임 이상의 형을 선고할 위험성이 있다는 의미다. 

한 법학자는 “술을 마신 상태로 저지른 범죄가 술을 마시지 않고 저지른 범죄보다 더 큰 벌을 받아야 하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자기 의지로 음주를 했을 때, 범죄를 예견하면서 술을 마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달리 보는 것이 책임주의”라고 강조했다. 해당 개정안으로는 음주의 의도와 관계없이 감경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게 문제라는 뜻이다. 

이외에도 2013년 6월 성폭력 특별법을 개정하면서 성범죄에 관한 한 판사가 재량에 따라 음주나 약물로 인한 심신미약 주장을 고려하지 않게 한 것도 해당 법안의 반대 논거로 쓰인다. 사실상 성범죄에서 주취감경은 거의 적용되지 않는 게 최근 법조계 분위기라고 한다. 

 

근거자료 및 출처
12월 6일 ‘11시 50분 청와대입니다’ / 조국 전 민정수석 출연
2017. 12. 6 문재인정부 청와대 (유튜브 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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