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X 객실 내 휠체어석에 골프채와 캐리어, 자전거 등이 적재 돼 있는 모습. /홍서윤 한국장애인관광협회 비상임이사
KTX 객실 내 휠체어석에 골프채와 캐리어, 자전거 등이 적재 돼 있는 모습. /홍서윤 한국장애인관광협회 비상임이사

소수의 공간을 침해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다. 몇 개 월 전 서울에서 순천으로 가는 KTX 안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른 아침 시간 휠체어가 탑승할 수 있는 유일한 객차에 사람들로 북적였다. 유독 짐을 든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 사람들은 전동휠체어석에 골프채와 캐리어 가방을 자연스럽게 내려놓았다. 심지어 한 중년의 남성은 자신이 타고 온 자전거를 전동휠체어석에 주차시켰다.

고속열차 내 휠체어석은 유일하게 1개 객차에만 존재한다. 대개 KTX 모델에 따라 2호차 혹은 3호차 1개 객차에만 휠체어석이 있다. 다른 객차는 통로나 출입문이 좁고, 객차 내 좌석이 가득차 있어 휠체어가 접근하기 어렵다.

휠체어석이 있는 객실 내부에는 보통 3개의 수동휠체어석과 2개의 전동휠체어석이 마련돼 있다. 수동휠체어석은 약간의 보행이 가능한 사람들이 좌석으로 이동한 다음 휠체어를 별도로 적재하도록 하거나, 목발 또는 지팡이 등 보행이 어려운 승객들이 주로 사용한다. 전동휠체어석은 부피가 큰 전동휠체어 사용자가 다른 좌석으로 옮겨 앉지 않고도 이용할 수 있도록 넒은 공간이 주어진 좌석이며, 열차 벽면에 휠체어 마크가 표시돼 있다.

KTX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열차에 휠체어석이 생기기까지 수많은 장애인의 요구가 있었다. 최근 뉴스를 통해 접하는 장애인 이동권 투쟁처럼, 버스·택시·기차 등 마땅히 탈 수 있는 교통수단이 전무했던 시기 이동권 보장 운동을 통해 얻어진 결과물이다.

단편적으로 보면 장애인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반영해 이들의 이동권을 보장하고 기차를 탑승하게 만든 유익한 결과물이다. 그것도 맞다. 하지만, 이동의 권리가 충분히 주어진 것과 권한의 일부가 할당된 것은 전혀 다르다.

표면적으로야 열차를 타고 출발지에서부터 목적지로 이동할 수 있으니 완벽해 보이지만, 사실 휠체어 사용 승객에게는 타인의 도움 없이 열차에 탑승할 수 있는 구조와, 좌석 등급이나 원하는 위치의 좌석을 선택할 선택권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저 시스템이 허락하는 대로만 열차에 탑승할 수밖에 없다. 비장애인 승객과 주어진 선택권이 극명하게 차이가 난다.

보장된 이동권이 아닌, 권력에 의해 할당된 주어진 공간의 사례가 열차 내 휠체어석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이 공간마저도 골프채, 캐리어 가방, 자전거로부터 침범당하고 있다. 좌석이 없는 넒은 공간이 일부 승객들에게는 짐칸 혹은 잉여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다.

지난해 4월 20일 한 장애인이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역에서 휠체어 리프트를 이용해 KTX열차에 탑승하고 있다. 이날 이준석 전 국민의 힘 대표 등 당 관계자들은 교통약자 이동편의 증진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현장방문한 바 있다. / 뉴시스
지난해 4월 20일 한 장애인이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역에서 휠체어 리프트를 이용해 KTX열차에 탑승하고 있다. 이날 이준석 전 국민의 힘 대표 등 당 관계자들은 교통약자 이동편의 증진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현장방문한 바 있다. / 뉴시스

소수의 공간이 침범되고 있지만 관리운영 주체는 손을 놓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 속에서 휠체어석을 사용하는 장애인과 큰 짐을 들고 오는 승객 간의 미묘한 갈등과 불편이 연일 이어지게 되는데, 승객들은 왜 이런 긴장감 속에서 눈치게임을 해야만 할까.

결국 문제는 공간의 권한을 모두 쥐고 있는 정부, 국토부와 코레일에게 있다. 승객을 고려하지 않은 설계의 병폐가 결국 승객의 불편으로 이어지게 된 결과이다. 곱게 양복을 빼입고 서류 가방만 들고 있는 승객만을 고려한 설계였을까. 커다란 짐가방을 들고 고향을 가거나 여행을 가려는 승객이 많다는 것을 간과한 설계 때문에 불편이 발생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결과적으로 승객에 맞게 공간이 설계되지 않고 공간에 맞추어 승객이 이용하다 보니 애로사항이 발생한 것은 자명하다.

독일의 고속열차에는 휠체어, 유아차, 자전거, 짐 캐리어 등 승객 유형을 고려한 좌석 배치가 세분화 돼 있다. 자전거를 동반한 탑승객의 경우 자전거 거치 비용을 추가로 지불하고, 좌석을 배정 받아 이동을 한다. 유아차나 휠체어는 넓은 공간이 필요해 가족 단위가 함께 모여 갈 수 있는 구조로 좌석이 설계됐다.

승객의 다양성을 고려하지 않게 되면서 공간 내 권력의 최약체인 소수의 공간이 쉽게 침해돼 버렸다. 결과적으로 휠체어 사용 승객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기회는 획득했지만 일반실과 특실로 차등되는 좌석의 등급과 창측/내측으로 기호에 맞는 자리를 선택한 권리는 여전히 주어지지 않는 반쪽짜리 이동의 기회를 얻은 셈이다.

비장애인 승객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친환경 교통수단 활용을 권장하는 기후위기 시대에 자전거의 광역 이동 핵심 교통망인 고속열차에 자전거가 탑재할 곳이 없고, 캐리어 가방을 둘 여유 공간조차 없는 불편을 계속해서 감내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과연 이대로 괜찮은가.

홍서윤 한국장애인관광협회 비상임이사 
홍서윤 한국장애인관광협회 비상임이사 

결국 고객과 고객 사이의 긴장 관계만 짙어지고, 그 사이에 중재를 해야 하는 객실 승무원들의 스트레스만 높아질 뿐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되지 않는 구조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동 휠체어석은 본연의 기능을 다 할 수 있도록 관리되어야 하며, 캐리어 가방이나 자전거가 탑재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여행을 가는 사람도, 자전거 애호가도 눈치보지 않게 되며, 휠체어 사용 승객도 유일한 자리가 침범될까 긴장하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고속열차 내 전동휠체어석 하나로도 열차 공간 내 권력 관계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알 수 있었다. 휠체어가 없으니 잠깐 앉아서 가도 되고, 잠깐 짐을 둬도 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은 결국 소수의 권리를 가장 쉽게 침범할 수 있는 시그널이다. 오히려 비장애인 승객도, 휠체어도, 유아차나 누구라도 앉을 수 있는 형태의 좌석이었다면 좁디좁은 공간 내 권력을 고민해보지는 않았을 테다.

지금 이대로라면 소수의 공간은 계속해서 침범될 것이고, 불편과 갈등이 심화될수록 그 침범은 용인될 것이다. 이러한 전개는 교통약자의 이동권 보장을 후퇴시키는 시그널이므로, 지금부터라도 다양한 승객의 욕구에 대응하지 못한 열차 공간의 재편이 필요하다. 큰 짐과 자전거를 탑재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휠체어석은 휠체어 사용 승객이 온전히 사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
 

홍서윤 한국장애인관광협회 비상임이사 프로필 

 

현) 한국장애인관광협회 비상임이사

현) 장애인문화예술원 비상임이사 

전) 한국방송공사 앵커 

전) 장애인여행문화연구소 대표 

전) 한국장애인관광협회 대표이사 

전) 한국교통안전공단 비상임이사 

전) 서울관광재단 비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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