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요즘처럼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는 햇볕이 무서워 집 밖에 나가지 않고 책상 앞에 앉아 시를 읽네. 오늘은 작년에 이민호 시인이 엮어 펴낸 김종삼 탄생 100주년 기념 시집인 『전쟁과 음악과 평화와』에서 주옥같은 시들을 만나 노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 그 중 「어부漁夫」는 예전에 매우 좋아했던 시인데,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워서 큰 소리로 읽고 또 읽었네.

“바닷가에 매어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거린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머얼리 노를 저어 나가서/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이 되어서/ 중얼거리려고//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잠시 눈을 감아 보게나. 바닷가에서 바람과 물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한가롭게 춤을 추고 있는 작은 고깃배 하나가 눈에 어른거리지. ​갈매기들의 울음소리를 노래 삼아 백사장 한 구석에서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는 늙은 어부도 보이고. ​한 장의 풍경 사진처럼 보이지 않는가. 하루하루가 모두‘화사한 날’이라는 듯 바다를 바라보는 노인의 표정이 밝아서 보기도 좋고. ​지난 며칠 동안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해서 그냥 강소주를 홀짝대고 있는 중이라고 투덜거리면서도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소주 한 잔을 권하는 품새가 얼마나 넓고 자애롭게 보이는지. 나도 모르게 그만 눈물이 핑…… ​겸연스레 술잔을 받아드는 나그네에게 늙은 어부가 한 말씀 건네는구먼.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지금 건강하고 즐겁게 살고 있는 게 다 기적처럼 보여. 날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새들 노래 들으며 춤을 추면서 걸을 수 있는 것, 세 끼 식사 꼬박꼬박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 아직 눈이 건강해서 누구 못지않게 많은 책을 읽고 틈틈이 글을 쓸 수 있는 것, 하루 종일 듣고 싶은 음악 골라 들으면서 다른 일 할 수 있는 것, 밤이면 편안한 마음으로 충분히 잘 수 있는 것, 카메라 들고 꽃을 찾아다닐 수 있는 체력과 여유가 있는 것, 무엇보다도 남은 생을 함께할 친구들이 아직 옆에 많이 남아 있는 것 등등 모두 다 기적이야. 누구나 다 그런 기적들을 누릴 수는 없다는 걸 알기에 만사에 감사해 하면서 더 겸손하게 살다 갈 수밖에.

지금까지 자네에게 소개한 많은 시들 중에 매우 뛰어난 골계미(滑稽美)의 진수를 보여 주는 시가 하나 있었네. 유안진 시인의 <계란을 생각하며>이야. 짧은 시이니 다시 한 번 함께 읽어보세. “밤중에 일어나 멍하니 앉아 있다// 남이 나를 헤아리면 비판이 되지만/ 내가 나를 헤아리면 성찰이 되지, 남이 터트려 주면 프라이감이 되지만/ 나 스스로 터트리면 병아리가 되지// 환골탈태(換骨奪胎)는 그런 거겠지.”정말 이해하기 쉽고 맛깔스런 시지.

지난 몇 년 동안 공식적인 노인으로 씩씩하게 살면서 스스로 환골탈태했네. ‘뼈를 바꾸고 탯줄을 바꾸는’지난한 노력으로 내 자신을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꿔버렸어. 소년이었을 때 시작해서 반백년 이상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마셨던 술을 단번에 뚝 끊어 버렸고, 날마다 세 끼 소식하면서 14시간 공복 상태를 유지했고, 하루에 만 보 이상 중강도로 걷는 유산소운동을 꾸준히 해서 2년 만에 10kg에 가까운 체중 감량을 했어. 그랬더니 몸과 마음이 얼마나 가볍고 편한지 몰라. 거기에다가 노자와 장자의 가르침에 따라 소욕지족을 생활화했더니 삶이 나도 모르게 매우 풍요롭게 변했어. 정말 기적이야.

『채근담』후집(後集) 111칙에는 “욕심을 멈추면 문득 달이 뜨고 바람이 불어오는 풍경이 보이니 굳이 인간 세상을 고해(苦海)라고 여길 필요도 없다”는 구절이 있네. 소욕지족하면서 자연을 벗 삼아 오늘이 이 세상 마지막 날일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다보면 기적처럼 하루하루가 좋은 날(日日是好日) 연속이야. 그러니 고려시대 때의 고승인 나옹선사의 선시(禪詩)가 입에서 절로 나올 수밖에.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지족(知足)하면, 아직 많은 기쁨이 우리 앞에 남아있다는 걸 잊지 말게. ‘인능허기이유세(人能虛器以遊世)면 기숙능해지(其孰能害之)’라는 장자의 가르침처럼, 자기를 비우고 자유롭게 살아간다면 누가 나를 해롭게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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