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강제추행죄의 ‘폭행 또는 협박’ 기준을 완화하는 내용의 판례를 새롭게 정립했다. 사진은 대법원 전경. / 대법원
대법원이 강제추행죄의 ‘폭행 또는 협박’ 기준을 완화하는 내용의 판례를 새롭게 정립했다. 사진은 대법원 전경. / 대법원

시사위크=연미선 기자  대법원이 강제추행죄의 ‘폭행 또는 협박’ 기준을 완화하는 내용의 판례를 정립했다. 이번 판결을 통해 공포심을 느낄 만한 협박이나 불법적인 유행력이 행사된 경우에도 강제추행죄가 성립할 수 있다고 인정한 것이다.

◇ 공포심 느껴도 ‘협박’으로 인정

현행 형법 제298조에서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에게 추행을 저지르는 행위를 ‘강제추행죄’로 정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형법 및 성폭력처벌법의 ‘강제추행죄’에서 주로 논란이 됐던 부분이 있다. 바로 ‘폭행 또는 협박’이라는 구성요건이다.

‘폭행 또는 협박’은 지금까지의 판례 법리에 따라 ‘상대방의 항거를 곤란하게 하는 정도’라고 제한적으로 해석되곤 했다. 즉 어떤 사건에서 강제추행죄가 인정되기 위해서는 피해자가 필사적으로 저항했는지를 따지는데, 이때 저항하지 못했다면 항거 곤란 수준의 폭행 또는 협박이 있었는지를 판단해 강제추행 여부를 결정해 온 것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항거가 곤란한 상태가 아니거나 공포심만을 일으키는 상황이라면 끝까지 저항했어야 한다는 인식을 내포한다며 비판이 제기됐다. 피해자에게 피해의 책임을 돌리는 것이란 지적이다.

이런 가운데 대법이 최근 ‘폭행 또는 협박’의 기준을 완화하는 취지의 판례를 새롭게 정립해 이목이 쏠렸다. 대법원은 지난 21일 ‘강제추행죄’와 관련된 사건의 원심판결을 파기‧이송하면서 ‘폭행 또는 협박’의 의미가 다시 정의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날 대법원은 “강제추행죄의 ‘폭행 또는 협박’은 상대방의 항거를 곤란하게 할 정도일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면서 “상대방의 신체에 대해 불법한 유형력을 행사(폭행)하거나 일반적으로 보아 상대방으로 하여금 공포심을 일으킬 수 있는 정도의 해악을 고지(협박)하는 것이라고 봐야한다”고 전했다. 이어 “종래의 판례 법리를 폐기한다”고 덧붙였다.

◇ ‘폭행 또는 협박’ 기준 완화… 왜?

이러한 결론이 나오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대법원은 이에 대해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우선 피해자의 항거 곤란을 요구하는 종래의 판례 법리는 강제추행죄의 범죄구성요건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형법 제298조 및 성폭력처벌법 제5조 제2항 등 강제추행죄에 관한 현행 규정에서는 폭행‧협박의 정도를 명시적으로 한정하고 있지 않다. 이런 가운데 ‘강제(强制)’의 사전적 정의가 반드시 상대방의 항거 곤란을 전제한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해당 판례 법리는 강제추행죄의 보호법익인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1953년 제정된 형법은 제298조(강제추행죄)를 담고 있는 제3편 제32장의 제목을 ‘정조에 관한 죄’라고 정하고 있었다. 이는 1995년 12월 형법이 개정되면서 ‘강간과 추행의 죄’로 바뀌었다. 이를 두고 대법원은 강제추행죄의 보호법익이 피해자의 정조나 성적 순결이 아니라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으로서 가지는 성적 자기결정권임을 분명히 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강제추행죄와 관련한 판례 법리는 이와 부합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대법원은 “피해자의 항거 곤란을 요구하는 기존의 판례는 여전히 피해자에게 ‘정조’를 수호하는 태도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강제추행죄에서 ‘폭행 또는 협박’은 형법상 폭행죄 또는 협박죄에서 정한 ‘폭행 또는 협박’을 의미하는 것으로 분명히 정의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근의 재판 실무는 가해자의 행위가 폭행죄 또는 협박죄에서 정하는 정도에 이르렀다면 사실상 상대방의 항거를 곤란하게 할 정도라고 해석하는 방향으로 변화해 온 것으로 알려진다.

대법원은 이에 대해 “이는 종래의 판례 법리에 따른 현실의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자칫 성폭력 범죄의 피해자에게 이른바 ‘피해자다움’을 요구하거나 2차 피해를 야기할 수 있다는 문제 인식을 토대로 형평과 정의에 합당한 형사재판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이미 현실에서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인정되기 위한 기준이 완화되고 있으니, 이와의 불일치를 해소하고 오해 및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종래의 판례 법리를 폐기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번 대법원의 결정은 성폭력 등과 관련한 처벌 수위가 낮다는 국민 법감정의 측면에서도 일부 일치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성폭력과 관련된 인식 변화 방향과도 일치한다. ‘2022년 성폭력 안전실태조사’에 따르면 피해자가 끝까지 저항해야 강제로 성관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남녀 응답이 2019년 26.9%에서 지난해 23.4%로 줄어든 바 있다.

한편 항거 곤란이라는 종래의 판례 법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시각도 나온다. 한 대법관은 “국어사전에서 강제는 정의 자체에 항거 곤란의 의미가 포함돼있다”면서 “또한 강제추행죄에서 항거 곤란으로 제한 해석돼야 △단순추행죄 △위력에 의한 추행죄와 분명한 구별이 가능하다”고 근거를 들기도 했다.

 

근거자료 및 출처
2022년 성폭력 안전실태조사 연구보고서
2023. 06. 한국여성정책연구원
형법 제298조
https://www.law.go.kr/%EB%B2%95%EB%A0%B9/%ED%98%95%EB%B2%95
  국가법령정보센터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위반(친족관계에의한강제추행) 사건(2018도13877)
2023. 09. 21. 대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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