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한국국가전략연구원 북한연구센터장​​​​​​​​​​​​​​​​​​​​​
이영종 한국국가전략연구원 북한연구센터장​​​​​​​

‘괴뢰(傀儡)’는 본래 ‘꼭두각시놀음에 나오는 여러 가지 인형’이란 사전적 의미를 갖고 있다. 여기에서 유래해 ‘남이 부추기는 대로 따라 움직이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도 쓰여 왔다.

그런데 북한 관영매체인 조선중앙TV가 뜬금없이 우리를 ‘괴뢰’라고 지칭하고 나섰다. 거친 대남비방이나 도발적 논평이 아닌 스포츠 중계에서 이 표현을 사용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조선중앙TV는 지난달 30일 열린 중국 항저우 아시안게임 남북 여자축구 8강전 경기를 이틀 뒤 녹화중계하면서 스코어 화면에 기존의 ‘남조선’ 대신 ‘괴뢰’라고 올렸다. 북한 쪽은 정식 국호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의미하는 ‘조선’으로 표기했다.

중앙TV는 “경기는 우리나라(북한)팀이 괴뢰팀을 4대 1이라는 압도적인 점수 차이로 타승한 가운데 끝났다”고 전했다. 조선중앙통신과 노동신문 등 북한의 선전매체들도 경기 소식을 전하면서 ‘괴뢰’라는 표현을 써 앞으로도 이런 기류는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괴뢰 호칭은 김정은 정권이 최근 들어 날카롭게 대남 대립각을 세워온 연장선에서 살펴볼 수 있다. 지난해 9월 이른바 ‘핵 무력 법령화’를 통해 핵 선제공격 가능성까지 열어놓은 북한은 올 들어 전술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미사일 위협을 가하며 도발 수위를 높여왔다.

이에 대응한 윤석열 정부의 강력한 대응과 한미일 공조에 대한 불만 표시로 ‘괴뢰’라는 표현까지 들고 나온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한국이 미국·일본과 의기투합해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고 북한의 체제변화를 꾀하려 한다는 생각일 수 있다.    

하지만 북한의 이런 움직임은 시대착오적이다. 남북은 과거 냉전 시기 체제대결을 벌이면서 상대를 ‘괴뢰’로 깎아내리며 비방선전을 펼치기도 했다. 우리도 1980년대까지 북한의 무장공비 침투나 아웅산·대한항공기 테러 등의 도발 때 국민의 격앙된 대북감정이 반영된 ‘북괴(北傀)’라는 표현을 쓰며 김일성과 김정일에 대한 화형식 등을 벌였다.

그렇지만 냉전은 종식됐고 남북한의 체제대결도 한국의 압도적 경제발전과 국제적 위상 격상으로 사실상 무의미한 수준에 이르렀다. 북한이 괴뢰라는 표현을 써도 그저 해프닝성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TV중계를 지켜봤을 북한 주민들도 아마 생뚱맞다고 생각했을 공산이 크다.

북한은 괴뢰 표현을 동원해 ‘남조선 때리기’에 매달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대한민국’ 호칭을 쓰며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인다. 지난 7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이른바 담화라는 걸 내면서 우리를 ‘대한민국’이라 호칭한 이후 공식 문건이나 발표에 종종 사용하는 추세다.

물론 북한이 금기시되던 대한민국이란 우리 정식 국호를 쓰는 건 대남비난이나 우리 체제를 비아냥거리려는 의도가 깔린 것으로 보인다. 김여정 부부장 담화가 우리 군 당국을 비난하면서 “《대한민국》족속들의 체질적 특질인 듯하다”고 비꼬는 것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대한민국을 언급하면서 ‘《 》’ 부호를 넣는 것에서도 뭔가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담으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일각에서는 이를 마치 대한민국이나 한국 정부, 우리 체제를 인정하려는 듯한 것으로 해석하려 하고 있지만 이는 잘못된 시각이나 분석이다. 오히려 북한은 대한민국 호칭을 통해 역설적으로 ‘미 제국주의에 의해 강점된 공화국 남반부’라는 자신들의 인식을 더욱 굳히려는 뜻으로 보는 게 맞다.

북한은 나아가 대한민국 호칭을 내세워 자신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대우받기를 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 여자 축구대표팀의 이유일 감독은 한국과의 경기에서 이긴 뒤 기자회견에서 우리 기자가 북한을 ‘북측’이라고 부르자 “북측이 아니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반발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 여자 농구 남북 대결에서 패한 뒤에는 기자가 ‘북한’이라고 언급한데 대해 “우리는 ‘DPRK’(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다. ‘노스 코리아’(North Korea)라고 부르지 말라. 그것은 좋지 않다. 이름을 정확히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북한의 저급한 ‘괴뢰’ 주장이나 ‘대한민국’ 호칭의 의도에 대해 과민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핵과 미사일 도발로 국제사회에서 고립되고 남북 체제대결에서도 심한 열패감을 보이고 있는 북한의 치기어린 행동에 안쓰러움을 금할 수 없다.

더욱이 그 전면에 북한의 스포츠인들이 나설 수밖에 없는 모양새는 볼썽사납기까지 하다. 체제고립과 대북제재에 코로나 사태까지 겹치는 바람에 오랜 은둔을 강요받다가 모처럼 국제 스포츠 무대에 나선 선수와 관계자들을 북한 당국은 정치선전의 돌격대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박물관에서나 찾을 법한 철지난 괴뢰 논란보다는 굶주리는 주민을 제대로 먹이고 인권을 보장하면서 국제무대에서 당당할 수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만드는 게 더 급선무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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