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많은 사람들이 가을이면 외롭고 쓸쓸한 계절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가을이 좋네. 비록 사계절 중 가장 짧은(약 60일) 계절이지만 산과 들에 핀 구절초, 쑥부쟁이, 각시취, 개미취, 산국, 감국 등 들국화을 볼 수 있어서 좋고, 하얀 털뭉치 꽃이삭을 달고 무리를 지어 춤을 추고 있는 으악새(억새)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아. 가을 햇볕 가득한 마당에서 붉은 고추를 말리는 마을을 보는 것도 좋고, 벼들이 노랗게 익는 황금벌판을 보면 저절로 배가 불러서 행복해지지.

가을은 또한 눈이 시리게 높고 파란 하늘을 자주 볼 수 있어서 좋네. 가끔 하얀 실구름이 흘러가는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가을 하늘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닐세. 윤동주 시인이 <소년>이라는 시에서 읊었던 것처럼, 하늘을 쳐다보고 있으면 눈썹에 파란 물이 들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면 손바닥에서 파란 물감이 묻어날 것 같아서 좋아. 얼마 남지 않은 가을이 가기 전에 지금 당장 밖에 나가 파란 하늘을 쳐다보게나. 하늘에서 가을 내음이 나고, 가을 소리가 들리고, 가을 얼굴이 보이고, 가을 맛이 나고, 가을 감촉이 느껴질 걸세.

내가 가을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울긋불긋 아름다운 단풍과 낙엽 때문이야. 사람들은 흔히 가을을 쓸쓸하고 슬픈 계절이라고 하지. 윤동주도 <소년>에서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는 시행(詩行)으로 시작했고, 초정 김상옥의 등단 작품인 시조 <낙엽>에서도 한 가닥 실바람에 떨어져 이리저리 뒹굴고 있는 이파리는 안타깝고 가엾은 존재일 뿐이라고 표현했네.

“맵고 차운 서리에도 붉게붉게 타던 마음/ 한 가닥 실바람에 떨어짐도 서럽거늘/ 여보소 그를 어이려 갈구리로 긁나뇨// 떨어져 구을다가 짓밟힘도 서럽거든/ 티끌에 묻힌 채로 썩일 것을 어이 보오/ 타다가 못다 탄 한을 태워줄까 하외다.”

정말 단풍과 낙엽을 슬픈 눈으로만 바라봐야 할까? 난 아닐세. 나무들이 잎을 통해 탄소동화작용(광합성)을 한다는 것은 자네도 알고 있지?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받아들여 포도당을 만들기 위해서는 뿌리에서 오는 물이 필요하네. 그 물은 나무의 물관을 통해 잎으로 전달되지. 하지만 추운 겨울에 그런 광합성을 계속한다면 어떻게 될까? 물관에 물이 있으면 얼어 터질 가능성이 높아. 그렇게 되면 나무의 생명도 위험하지. 그래서 떨기나무들은 가을이 되면 이파리에 물을 공급하지 않기로 결정하네. 그래서 엽록소의 초록빛이 사라지고 잎들이 본래 가지고 있었던 색깔이 드러나는 거야. 그게 단풍이야. 그게 떨어지면 낙엽인 거고.

떨기나무가 잎을 떨어뜨리고 있는 모습을 나무의 고통이나 슬픔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지만 난 그렇게 보지 않아. 봄부터 반 년 이상 열심히 일했으니 나무도 겨울에는 쉬고 싶어서 기꺼이 즐겁게 내린 결정이라고 믿어. 사람들 생각처럼 혹독한 겨울 추위를 이기고 살아남기 위해 이파리를 떨어뜨리는 것도 맞지만, 겨울 동안 편히 쉬면서 내년에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준비 기간을 갖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 그래서 가을이면 옷을 벗는 나무들의 행위를 안타깝고 슬프게만 보지 않아. 사실 우리 인간들도 산업화 이전에는 겨우내 그냥 쉬면서 놀았네. 그게 먼 옛 이야기가 아니야. 우리 어렸을 때는 긴 겨울이 농사 짓는 사람들의 휴가철이었으니까. 사시사철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는 지금 우리들의 신세가 더 안타깝고 슬픈 일이라고 나무들이 오히려 인간들을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르지. 자본과 정치권력에 속고 사는지도 모르고 일만 하는 벌레들이라고.

나는 나무들의 생존 방식이 옳다고 믿네. 사람도 주기적으로 새로운 삶을 위해 죽음의 의식(儀式)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주기적으로 죽음을 맛봐야 한다는 뜻이야. 물론 실제로 죽어보라는 건 아니고, 새롭게 태어나라는 거지. 스리랑카의 철학자이자 미술사가인 아난다 쿠마라스와미는 “존재를 그만두지 않고는 어떤 생명체든 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를 획득할 수 없다”고 했네. 더 풍부한 삶을 위해 계속 변해야 한다는 뜻이지. 평생 똑 같은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게 결코 자랑이 아님을 일깨워주는 귀한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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