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얼마 전에 제천 청풍호에 자주 간다는 말을 했었지. 어렸을 적에 물이 흔한 강변 마을에 살아서 그런지 크고 작은 강과 호수들을 자주 찾게 되는구먼. 지난주에는 우리나라 4대 갈대밭 중의 하나인 충청남도 서천에 있는 ‘신성리 갈대밭’에 다녀왔네. 그렇게 많은 갈대를 본 건 생전 처음이야. 넓은 갈대숲 사이를 천천히 걷고 있으니 많은 소리들이 들리더군. 이제 바다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강물 가족의 속삭임도 들렸고, 쉬었다 가라고 강물을 붙잡는 갈대들의 정감 어린 꼬드김 소리도 있었어. 압권은 강바람의 반주에 맞춰 강물과 갈대들이 함께 부른 거대한 합창이었네. 10만여 평이 넘는 드넓은 갈대밭에서 자연이 함께 어울려 만들어내는 장엄한 합창이라고나 할까. 그때 생각난 시가 강은교 시인의 <물길의 소리>일세.

“그는 물소리는 물이 내는 소리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렇군, 물소리는 물이 돌에 부딪히는 소리, 물이 바위를 넘어가는 소리, 물이 바람에 항거하는 소리, 물이 바삐 바삐 은빛 달을 앉히는 소리, 물이 은빛 별의 허리를 쓰다듬는 소리, 물이 소나무의 뿌리를 매만지는 소리…… 물이 햇살을 핥는 소리, 핥아대며 반짝이는 소리, 물이 길을 찾아가는 소리……// 가만히 눈을 감고 귀에 손을 대고 있으면 들린다. 물끼리 몸을 비비는 소리가. 물끼리 가슴을 흔들며 비비는 소리가. 몸이 젖는 것도 모르고 뛰어오르는 물고기들의 비늘 비비는 소리가……// 심장에서 심장으로 길을 이루어 흐르는 소리가. 물길의 소리가.”

그가 누구인지 이 시를 보고는 알 수 없지만, 물소리가 물이 내는 소리가 아니라는 건 맞는 말일세. 수소 원자 둘과 산소 원자 하나로 이루어진 물 한 방울이 스스로 소리를 낸다고 생각해보게. 아마 우린 시끄러워서 살 수 없을 거야. 우리 인체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들 중 약 70%가 물이라는 건 알지? 물이 스스로 소리를 낸다면 우리 몸에서 나오는 소리들 때문에 하루도 버티기 어려울 걸세. 물론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동식물들에서 나오는 소리는 더 요란하겠고.

시의 화자는 물소리가 물이 돌, 바위, 바람, 달, 별, 소나무의 뿌리, 햇살 등을 만나서 내는 소리라고 말하네. 혼자서 스스로 내는 소리가 아니라 다른 존재들을 만나야 나오는 소리라는 거지. 시인은 또 물끼리 몸을 비비거나 가슴을 흔들며 비빌 때도 소리가 난다고 하네. 이 또한 물방울 하나가 단독으로 내는 소리는 아니지.

『장자』내편 「제물론」에 나오는 스승 남곽지기와 제자 안성자유의 대화가 생각나는군. 여기서 스승은 제자에게 세 가지 퉁소소리, 즉 인뢰(人籟), 지뢰(地籟), 천뢰(天籟)를 설명하네. 인뢰는 대나무 퉁소가 내는 소리이고, 지뢰는 땅이 부는 바람소리이며, 천뢰는 자연의 바람소리야. 그 중 땅덩어리가 내뿜는 기(氣)인 바람과 나무의 크고 작은 구멍들이 마주쳐서 내는 소리인 대지의 퉁소소리를 들어보게. 다 읽고 눈을 감으면 다양한 땅의 소리들이 계속 들려올 것일세.

“높고 험준한 곳에서 백 아름 되는 나무의 크고 작은 구멍들, 어쩌면 코 같고, 입 같고, 귀 같고, 술병 같고, 술잔 같고, 절구 같고, 웅덩이 같고, 구덩이 같은 데서 청아한 소리, 외치는 소리, 고함치는 소리, 피리 부는 소리, 부르짖는 소리, 우는 소리, 신음하는 소리, 지저귀는 소리를 제각각 내지. 그리고 부는 바람이 우~ 하고 가벼운 소리를 내면 바람에 부딪친 나무구멍은 워~ 하고 무거운 소리로 화답하네. 또 산들바람에 작은 소리로, 거센 바람엔 큰 소리로 화답하는데 거센 바람이 멎으면 수많은 구멍들은 이네 조용해지네.”(『장자』, 김정탁 역)

강은교 시의 화자와 『장자』의 남곽지기는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네. 물이든 바람이든 스스로 소리를 내지는 못한다는 거야. 다른 존재가 필요하다는 거지. 맞는 말일세. 이 세상에, 아니 이 우주에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존재는 없네. 세상 모든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인간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야. 아무리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는 사람도 다른 존재들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어떤 식으로든 마주치는 타자가 있어야 내가 할 일이 생기는 거지.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게 감사할 줄 알아야 하네. 내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취하는 다른 생명들에게 미안해 할 줄도 알아야 하고, 적게 먹고 적게 버려야 해. 남는 게 있으면 더 늦기 전에 기쁜 마음으로 나눌 줄도 알아야 하고.

갈대밭을 걸으면서 뭐든 마주쳐야 소리가 나고, 허리 숙여 감사해야 할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다니… 일흔이 넘어서야 서서히 철이 들기 시작하는가 보네. 너무 늦었나? 갈대 친구들에게 고맙다고 큰 절이라도 하고 싶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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