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어렸을 때 명절이 즐거웠던 이유 중 하나는 맛있는 음식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지금은 그 반대지. 이제 명절이면 어떻게 하면 적게 먹을지를 고민하게 되네. 기름진 음식 많이 먹으면 몸과 마음이 다 힘들어. 이번 설 연휴에는 소식이 건강과 장수에 좋다는 글들을 읽으면서 지냈네. 그러면서 만난 이덕무의 소식 예찬일세.

“나는 일찍이 배가 부르게 음식을 먹는 것은 사람의 정신을 혼탁하게 해 독서에 크게 이롭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손님이 “소년들을 많이 살펴보았는데, 밥을 많이 먹는 자는 반드시 요절했다”고 말했다. 지금 『박물지(博物志)』를 펼쳐 보았다. 그곳에는 “적게 먹으면 먹을수록 마음이 열리고 더욱 맑아진다. 많이 먹으면 먹을수록 마음이 막히고 수명은 줄어든다”고 적혀 있다. 앞서 내가 말한 것이 징험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정주 엮고 옮김, 『문장의 온도』, 117쪽)

이덕무의 산문집 『이목구심서 6』에 나오는 글이네. 여기『박물지(博物志)』는 중국의 위진 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에 장화(張華)가 편찬한 책으로 세상 온갖 것들에 관한 백과사전적 기록이야. 책만 읽는 바보였던 간서치(看書癡)의 말이니 깊이 새겨들을 수밖에. 배가 부르면 책에 집중할 수 없는 게 사실이거든. 졸음이 오기도 하고.

‘블루 존(Blue Zone)’이라는 말 들어봤지? 그리스의 이카리아, 일본의 오키나와, 이탈리아의 사르디니아,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로마린다, 남미 코스타리카의 니코야반도를 블루 존이라고 불러. 쉽게 말하면 장수촌으로, 건강하게 사는 100세 이상 노인 인구 비율이 높은 곳이야. 그 다섯 곳 가운데에서도 여성들의 수명이 가장 길고, 100세 이상 인구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 일본의 오키나와지. 그곳 주민들이 다른 블루 존 사람들과 다른 생활 습관 하나는 옛 조상들의 가르침인 ‘하라하치부’(복팔분 腹八分)을 계속 따르고 있는 거야. 복팔분은 식사할 때 배를 80퍼센트만 채운다는 뜻이야. 약간 배가 고플 정도로 먹어야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다는 거지.

소식(小食)이 신체와 정신 건강에 다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천하기 어려운 이유는 뭘까? 소식에 성공하려면 엄청난 인내심과 자기 수양이 필요하기 때문일세. 우리 뇌는 기름지거나 달콤한 음식을 필요한 열량보다 더 많이 먹게 진화되었네. 아주 옛날 우리 조상들이 사냥과 채집을 통해 끼니를 해결하던 시절에는 굶는 날이 많았어. 그래서 운 좋게 큰 동물을 사냥하면 폭식할 수밖에 없었지. 그렇게 운 좋은 날이 언제 또 있을지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야. 그런 진화의 영향으로 우리는 지금도 열량이 많고 달콤한 음식을 좋아하며, 그런 음식을 많이 먹을 때 뇌의 행복감도 커지게 되네. 그래서 기름진 음식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먼저 뇌의 간청부터 단호하게 거부할 수 있어야 해. 보통 사람들에게는 술, 담배, 마약의 유혹을 뿌리쳐야 하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이지. 그래서 소식에 성공하려면 많은 인내가 필요한 거야.

게다가 식사는 생리적인 활동인 동시에 사회적 활동이기도 하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평생 혼자서 살 수는 없어. 외톨이(아웃사이더)가 되지 않으려면 가족이나 친구들과 자주 식사를 해야 해. 그때 소식을 하는 사람들은 많은 사회적 압력을 받게 되지. 식사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 열량이 가득한 기름진 음식을 즐겁게(?) 먹어야 할 때도 많아. 어떤 때는 함께 식사하는 사람들의 불만 섞인 표정이나 냉소적인 농담도 웃으면서 받아들이는 여유도 있어야 해. 그러니 자기수양이 필요할 수밖에.

소식(小食)을 실천한 지 벌써 4년이 되어가네. 노인이 되면서 나를 바꾸려고 많은 노력을 했는데 그 중 가장 잘한 게 꾸준히 운동하면서 적게 먹는 거야. 불가피한 모임에서가 아니면 소 돼지 닭 등 가축의 고기와 밀가루 음식은 먹지 않네. 술을 좀 마셔야 삶이 즐겁다는 젊었을 때의 망상은 진작 버렸어. 집에서는 커피도 마시지 않아. 굳이 이 나이에 알코올과 카페인을 흡수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거든. 그런 약물의 도움 없이도 뇌가 필요할 때마다 도파민을, 그것도 너무 과도하지 않게, 분비해주고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지…… 지난 몇 년 동안 꾸준히 걷고, 책 읽고, 사진 찍으면서 화양연화(華陽年華)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던 게 다 소식 덕분일세.

그래서 죽을 때까지 지금 식습관을 유지할 작정이네. 이 세상을 떠날 때는, 물론 희망 사항이지만, 윤효 시인의 어머니처럼 스스로 곡기를 끊을 거고. <완생>이라는 시일세.

“그렇게 좋아하시던 홍시를 떠 넣어 드려도/ 게간장을 떠 넣어 드려도/ 가만히 고개 가로저으실 뿐,// 그렇게 며칠,/ 또 며칠,// 어린아이 네댓이면 들 수 있을 만큼/ 비우고 비워 내시더니/ 구십 생애를 비로소 내려놓으셨다.// 완생(完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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