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유태오가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감독 셀린 송)로 관객 앞에 섰다. / CJ ENM
배우 유태오가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감독 셀린 송)로 관객 앞에 섰다. / CJ ENM

시사위크=이영실 기자  배우 유태오에게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감독 셀린 송)는 그저 필모그래피에 추가된 하나의 작품이 아니다. 결코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았던 과거 유태오의 시간들과 현재의 노력, 진심이 만나 빚어낸 값진 결과물이자, 앞으로 더욱 빛날 그의 미래를 기대하게 하는 ‘무기’가 됐다. 

지난 6일 개봉한 ‘패스트 라이브즈’는 서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첫사랑 나영(그레타 리 분)과 해성(유태오 분)이 24년 만에 뉴욕에서 다시 만나 끊어질 듯 이어져 온 그들의 인연을 돌아보는 이틀간의 운명적인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한국계 캐나다인 셀린 송 감독의 데뷔작이다.

제39회 선댄스영화제에서 월드 프리미어 공개 후 세계적 극찬을 받은 ‘패스트 라이브즈’는 미국 시상식 시즌 각종 신인감독상과 작품상, 각본상을 휩쓸며 전 세계 76관왕 217개 노미네이트라는 쾌궈를 이뤘다.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과 각본상 부문에도 노미네이트돼 기대를 모으고 있다.

극 중 유태오는 24년 전 이민을 간 첫사랑 나영을 만나기 위해 뉴욕을 찾아가 해성을 연기했다. 독일 교포 출신이라는 이미지로 제한적인 역할을 소화해야 했던 유태오는 한국 정서를 가득 담은 ‘해성’이라는 새로운 기회를 만나 연기 스펙트럼을 확장했고, 최선을 다한 결과물로 한국 배우 최초 제77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BAFTA)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는 등 의미 있는 성과를 거뒀다. 

최근 <시사위크>와 만난 유태오는 “연기자로서 살아가는 것, 연기를 하는 행위가 무엇인가에 대해 철학적인 고민을 깊이 하게 됐고 연기에 접근하는 방식도 완전히 달라졌다”며 ‘패스트 라이브즈’와 함께한 순간을 돌아봤다.  

새로운 도전을 마친 유태오. / CJ ENM
새로운 도전을 마친 유태오. / CJ ENM

-국내 개봉 소감은. 

“나는 교포잖나. 다국적인 문화 배경 출신이라 언어와 어휘력에 대한 걱정이 늘 있다. 평범한 한국남자를 표현해야 하는 배우를 찾는 단계에서 굳이 나를 왜 선택했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렇지만 감독에게 묻진 않았다. 연기는 주관적으로 해야 하는데 그 요소 때문에 객관화시켜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지점에 대한 두려움은 있지만, 처음 시나리오 읽었을 때 ‘인연’이라는 철학, 마지막 장면이 주는 여운 때문에 눈물이 났는데 그 느낌만 잘 전달된다면 누구라도 영화를 잘 봐줄 수 있을 거란 믿음도 있었다. 그래서 설레고 기대가 되기도 한다. 연기에 대한 평가를 들으면서 어떻게 발전해야 할지도 고민해야 할 것 같다.”

-말한 것처럼 해성은 한국 정서를 가득 담은 인물이었다. 간극을 줄이기 위해 어떤 고민을 했나.

“캐릭터에 접근할 때 어떤 점이 다른지 파악해 보고 어떤 점이 공통점인지도 탐구한다. 그래서 간극을 줄이기보다 맞는 포인트에 더 집중을 하려고 한다. 해성에 대한 나의 해석을 나누자면, 우리나라 문화 안에서 우리만 느낄 수 있는 상황 속 변함없이 살아가야 하는 것에 대해 나는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다. 다문화적인 배경 때문에 나도 그런 면이 너무 많거든. 소속감이 들고 싶기도 하고 결핍도 많은데 그 결핍을 없애느라 소통할 때 더 정확하게 하려는 말의 선택들, 노력은 하지만 의지로 되지 않는 상황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에 대한 한이 맺혀 있다. 

그런 한이 내 인생에서 어떻게 보면 슬픔과 아픔인 거다. 그것이 ‘멜랑콜리’로 많이 표현된다. 표현의 단계에서 잘 전달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지만, 참 신기한 것은 어떤 배우가 어떤 지점에 대해 전문가가 될 수 있듯 나는 나의 ‘멜랑꼴리’를 표현하는 데 자신감이 있다. 누구보다 깊게 느낄 수 있는 사람이고 어떤 문화에서 봐도 그 감성을 자극할 수 있는 방식이 무엇인지 안다. 내 안에 그 감성이 너무나 큰 면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해성을 잘 표현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걸 믿고 갔다.”

한국 정서를 가득 담은 인물인 해성을 연기한 유태오 스틸. / CJ ENM
한국 정서를 가득 담은 인물인 해성을 연기한 유태오 스틸. / CJ ENM

-영어에 서툰 설정도 신선했다. 어려움은 없었나. 

“항상 연기 코치님과 같이 준비한다. 언어 치료도 하고 연기도 준비하는데 어떤 어휘와 톤을 가져가느냐에 따라 문화 배경이 나타난다. 뉘앙스를 어떻게 할지 결정하고 내 안에서 모든 준비가 됐을 때 연기에 들어가는데 연기하는 순간에는 우리나라 시장만 바라보는 게 아니고 외국 사람에게 이 어휘가 어떻게 들릴 것에 관한 고민도 같이 들어가야 한다. 영화 역사상 할리우드에서 동양인 남자는 ‘무인간화’시키는 요소들이 너무 많다. 웃음거리의 요소다. 장르로 봤을 때는 코미디나 무술 같은 장르에서 스테레오 타입으로 주로 소비된다. 

이번 작품은 동양의 CJ ENM과 서양의 A24가 손을 잡고 동양인 남자가 이끄는 로맨스 영화인데, 그것을 무게감 있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에 관한 숙제가 주어졌다. (서툰 영어를) 표현했을 때 우스꽝스럽지 않고 진지하게 들려야 한다. 또 외국인이 들었을 때 그 장르 안에서 잔잔하게 느껴질 수 있도록 하는 어투여야 한다. 그걸 잘 설득하게끔 하는 게 고독한 길이지만 나의 숙제고 내가 표현해야 할 문제다. 한국어를 하거나 ‘콩글리시’를 썼을 때 각 시장의 공통 감수성을 찾고자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꼽자면. 

“침대에서 아서와 나영이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아서가 한국말로 잠꼬대하는 나영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는 모습이 있어서 한국말을 배우고 싶었다고 말하는데 그 모습이 되게 찡했다. 울컥하더라. 정체성이라는 게 너무 재밌는 것 같다. 가족끼리라도 같은 언어를 쓰지만 다른 언어를 쓰고 있다. 정체성과 자아, 개인적인 문화를 갖고 있는 이들이 서로 소통하고 알아듣고 싶어 하지만 그 안에서 오해가 생기기도 하고 싸움도 일어난다. 화해하고 싸우고 그런 과정이 참 재밌다.”

‘패스트 라이브즈’로 호흡을 맞춘 유태오(왼쪽)와 그레타 리. / CJ ENM
‘패스트 라이브즈’로 호흡을 맞춘 유태오(왼쪽)와 그레타 리. / CJ ENM

-이민자의 삶을 살아가는 나영에 대해서도 깊이 공감했겠다. 

“외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게 내 ‘팔자’다.(웃음) 배우자와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축복’이라고 하더라. 내가 그걸 느낌으로써 더 많은 것을 표현할 수 있는 팔레트가 생긴 거라고. 감정의 범위가 넓어지니까 그것이 나만의 무기라고.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나의 숙제라고 생각하지만 고통스럽다고 그걸 거부하진 않는다. 그것이 나를 죽이지 않는 이상 나는 더 강해지는 사람이다. 외롭긴 하지만 좋기도 하다.”

-‘인연’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이 단어가 배우에게는 어떤 의미인가. 

“동양적인 불교 철학의 인연, 팔자, 운명이 무엇인가를 완벽하게 소화해야만 해성에게 맺힌 감정이 아름답게 해소됐다는 걸 표현할 수 있었다. 완전히 이해하고 소화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다. 그 과정에서 많이 느끼고 많이 배웠다. 작품 자체가 나의 커리어를 변화시키기도 했지만 나의 연기와 연기에 접근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앞으로 만나게 될 캐릭터를 ‘인연’으로 바라보게 되면 이미 내가 살았던 ‘영혼’이 되는 거다. 어떤 캐릭터가 돼야 할 것이라는 기술적인 면에 접근할 필요가 없는 거다. ‘저스트 비(Just Be), 그냥 그 자체가 되는 거다. 내 인생에서 연기자로서 살아가는 것, 연기를 하는 행위가 무엇인가 등에 대해 철학적인 고민에 빠졌다. 이 세상에서 나의 위치에 대한 생각도 깊게 하게 됐다. 그래서 연기에 접근하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다.” 

유태오가 오스카 입성 소감을 전했다. / CJ ENM
유태오가 오스카 입성 소감을 전했다. / CJ ENM

-‘패스트 라이브즈’의 최종 종착지는 아카데미 시상식이다. 오스카 수상에 대한 기대는. 

“인생을 기대 없이 사는 사람이다. 희망은 있지만 기대는 없다. 기대하면 상처받을 여지가 생기니까. 나는 미래에 살지 않고 과거에 살지도 않고 현재에 있다. 그래서 그 상황이 오지 않은 이상 실감이 안 난다. 영국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을 때도 매니저가 스피치 준비해 놨냐고 하더라. 그래도 수상 소감은 준비하라고 해서 시상식 2시간 동안 머릿속으로 스피치 리허설만 했다. 더듬으면 안 되니까.(웃음) 레드 카펫에서 누가 상을 받았으면 좋겠냐고 물어봤을 때 킬리언 머피라고 했다. 동양적인 감수성이긴 하지만 선배가 먼저 받는 게 맞다 생각했고 20년 전부터 킬리언 머피를 공부했기 때문이다. 

끝나고 용기 내서 킬리언 머피에게 다가가 ‘당신이 타서 좋다, 옛날부터 좋아했고 지금이 대세니까 받을 수 있는 걸 다 받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안아주면서 고맙다고 하더라. 그러더니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과 인사를 시켜줬다. 좋은 순간이었다. 20년 동안 연기를 해왔고 그 안에 나의 철학도 있지만 미국에서는 신인이다. 한 5년 동안은 어디에 어떤 후보가 돼도 기대하지 않고 이 커뮤니티 안에서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더 크다. 즉 연기로 실력을 보여준다는 거다. 아쉬운 소리 하지 못하게 열심히 보여줘야지. 그걸 대비하기 위해 지금 열심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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