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겨울철이면 베란다 창으로 스며드는 햇볕을 쬐며 동네 야산을 바라보는 시간이 많네. 얼굴을 간지럽히는 금빛 햇살이 정겹고 포근해서 좋아. 겨울 햇살은 옷이고 이불이라는 옛사람들의 말을 절로 실감하지. 햇빛이 좋은 날이면 그리운 것들도 많아지네. 어렸을 적 겨울철에 양지쪽 흙담 아래서 함께 해바라기했던 동무들의 누런 얼굴들이 하나둘 햇살을 타고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도 해. 혼자 흥겹게 해바라기할 때 떠오르는 허영자 시인의 <겨울햇볕>이라는 시일세.

“내가 배고플 때/ 배고픔 잊으라고/ 얼굴 위에 속눈썹에 목덜미께에/ 간지럼 먹여 마구 웃기고// 또 내가 이처럼/ 북풍 속에 떨고 있을 때/ 조그만 심장이 떨고 있을 때/ 등어리 어루만져 도닥거리는// 다사로와라/ 겨울 햇볕!

하지만 아쉽게도 지난 겨울에는 햇빛 보기가 쉽지 않았네. 온종일 구름이 잔뜩 끼어 흐린 날과 비나 눈이 온 날이 너무 많았어. 기상청이 지난 3월 7일에 발표한 ‘2023년 겨울철 기후 분석 결과’를 보면 지난 겨울철(2023년 12월~2024년 2월) 전국 강수량은 236.7mm로 평년의 89.0mm보다 2.7배 많아서 역대 1위를 기록했네. 비나 눈이 온 날도 31.1일로 가장 많았어. 그러니 겨울에 햇빛 보기가 힘들었을 수밖에.

그래서 올해는 봄이 오길 더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네. 빨리 산과 들에 나가 꽃도 보고, 사진도 찍고, 겨울에 제대로 쐬지 못했던 햇볕도 듬뿍 안아보고 싶거든. 기후온난화로 예전에 비해 봄이 많이 짧아졌고, 우리는 이미 여름 햇볕을 무서워하는 노인이라는 건 알지? 그러니 이른 봄에 단내 나는 햇빛을 쐬고, 남으면 여름을 위해 저축도 해야 한다는 걸 잊지 말게. 나희덕 시인이 <허락된 과식>에서 말했던 것처럼 말이야.

“이렇게 먹음직스러운 햇빛이 가득한 건/ 근래 보기 드문 일// 오랜 허기를 채우려고/ 맨발 몇이/ 봄날 산자락에 누워 있다//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햇빛을/ 연초록 잎들이 그렇게 하듯이/ 핥아먹고 빨아먹고 꼭꼭 씹어도 먹고/ 허천난 듯 먹고 마셔댔지만// 그래도 남아도는 열두 광주리 햇빛!”

도시에서 살면 햇빛 보기가 쉽지 않네. 콘크리트 건물 안에서 전깃불만 보고 살지. 예전보다 모든 게 풍부해졌어도 도시의 많은 사람들이 우울하게 사는 이유 중 하나가 햇빛 부족 때문이야. 그러니 시인의 말대로 봄에라도 건물 밖으로 나가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햇빛을 ‘핥아먹고 빨아먹고 꼭꼭 씹어도 먹고/ 허천난 듯 먹고’마실 수밖에. 그래도 남으면 가방에 가득 담아 와도 좋고. 아무리 먹어도 배탈 나거나 살찌지 않는다니 얼마나 좋은 음식인가. 게다가 공짜이니 돈 걱정할 필요도 없고.

봄날 햇빛은 냄새도 좋네. 햇빛에서 냄새가 난다고? 물론이지. 예전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런 햇빛 냄새를 맡고 살았어. 하지만 지금은 아주 귀한 냄새가 되어버렸지. 인간의 어리석음 때문에 희소성이 매우 높아졌다고나 할까. 그래서 많은 돈을 줘도 쉽게 살 수 없는 냄새지만, 아직도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얻을 수 있는 향내이기도 해. 그러면 어떤 시인이 “향기로운 탄내”라고 말했던 햇빛 냄새를 어디서 맡을 수 있을까? 태양이 말린 옷과 이불이야.

우리 동네의 봄은 빨래와 함께 오네. 햇볕이 따뜻해지기 시작하면 이집 저집 빨래들이 밖으로 나오기 시작해. 옥상에도 보이고, 베란다에도 보여. 심지어 골목길에서도 볼 수 있지. 가난한 동네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라고 창피하게 생각하는 주민들도 있다지만, 나는 우리 동네 빨래 풍경이 좋아.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그림이거든. 노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라 골목에서 빨래를 말려도 흉보거나 가져가는 사람도 없어. 빨래는 햇볕과 바람에 말리는 게 가장 좋다는 건 알지? 햇볕과 바람만큼 생태친화적인 건조기는 없어. 왜 전기를 써가면서 빨래를 말려야 ‘문명화된 삶’이 되는지 나는 아직 몰라. 내가 아파트보다 옥상이 있는 주택을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도 햇볕에 말린 옷을 입고 싶기 때문이네. 햇볕에 말린 속옷과 이불이 얼마나 뽀송뽀송 좋은지 직접 입어보고 덮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를 거야. 게다가 옷과 이불에서 햇빛 냄새까지 맡을 수 있으니 몸과 마음이 다 가벼워질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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