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 정소현 기자] 전문경영인을 비롯한 오너 일가의 ‘월급봉투’가 공개됐다. 연봉 5억원 이상 등기 임원의 보수를 공개하도록 한 ‘자본시장법’에 따라 최근 주요 대기업이 해당 임원의 보수를 공개하면서 오너 일가의 연봉 규모가 밝혀진 것이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배임 등의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고 수감중인 SK 최태원 회장은 지난해 301억원의 보수를 받았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131억원,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47억5,000만원의 연봉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 사진은 지난해 6월 30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중국 산시성 시안에 건설 중인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현장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 안내를 마치고 김포공항으로 귀국하고 있는 모습.
◇ 취지 무색해진 연봉공개

이번 연봉공개의 취지는 ‘경영투명성’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수십억에서 수백억을 받는 임원들이 과연 그만한 경영성과를 내고 받는 것인지 공개해서 주주의 권리를 강화하자는 데 본래의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일단 취지에는 공감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실효성을 두고서는 의문의 목소리가 많다. 실질적으로 관심을 모으고 있는, 일부 재벌가 오너 임원들의 연봉은 전혀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비롯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서현 사장 등 재계 서열 1위 ‘삼성가(家)’ 오너들은 이번 연봉공개 대상에서 제외됐다. 개정된 ‘자본시장법’은 연봉 공개 의무 대상자를 기업의 ‘등기이사’로 국한시켰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난 상태로, ‘미등기임원’이다.
 
범 삼성가인 신세계그룹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정용진 부회장을 비롯해 그의 모친인 이명희 회장과 동생인 정유경 부사장 등 신세계그룹 오너 일가 대다수는 미등기이사다.

이 때문에 재계를 비롯한 정치권 안팎에서는 ‘자본시장법’의 취지가 무색하다는 지적이 커지고 있다. 실질적으로 그룹의 의사결정에 막대한 영향력을 쥐고 있으면서도 미등기임원이라는 이유로 연봉공개 대상에서 빠지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지적인 것이다.

특히 지난해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앞두고 ‘등기이사’에서 ‘미등기임원’으로 갈아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에 대해선 비난의 목소리가 더욱 커지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해 모든 계열사의 등기이사직에서 사퇴했으며, 정용진 부회장 역시 지난해 2월 신세계와 이마트의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나 이번 연봉공개 대상에서 빠졌다.

당시 삼성과 신세계 측에선 이들의 등기이사 사임에 대해 “전문경영인의 책임경영 강화 차원”이라는 앵무새 같은 답변을 내놨다. 하지만 이들이 ‘등기이사’를 포기한 데는 경제민주화 바람과 함께 대기업 오너 일가의 책임 경영에 대한 부담감이 결정적이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법적 책임에서도 벗어나고, 연봉공개도 피할 수 있기 때문에 등기이사를 포기하는 ‘꼼수’를 부린 것이란 지적이다.

이는 결국 소수의 지분을 갖고 황제경영을 하면서도 ‘책임’을 회피하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들이 대한민국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로열패밀리’로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외면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 사진은 지난해 3월 26일, 국회 국정감사와 청문회에 출석하지 않은 혐의로 기소된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이 서울중앙지법으로 출두하고 있는 모습.
◇ 권한은 누리고, 책임은 회피

실제 이재용 부회장의 경우, 지난해 인사에서 사장에서 부회장으로 승진한 만큼 등기이사를 선임해 그룹을 책임져야 한다는 의견이 그룹 안팎에 팽배했지만 그는 이런 기대감을 철저히 외면했다. 정용진 부회장 역시 그동안 책임경영을 강조했지만, 당시 국감 불출석으로 재판에 회부되는 등 악재가 잇따르자 곧바로 몸을 사리는 모습을 보여 ‘책임경영’에 대한 이중적 태도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재계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시사위크>와의 통화에서 “이들의 ‘미등기임원 갈아타기’는 전형적인 책임경영 회피 사례”이라면서 “등기이사직 사퇴를 통해 ‘법적책임 회피와 연봉공개 대상 제외’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것이다. 하지만 주목할 점은 등기이사에서만 사퇴했지, 오너로서 막강한 권력은 여전하다는 점이다. 결국 등기이사가 져야 할 법적인 책임도 피해가면서도 사회적·도덕적 책임을 외면하고 싶은, 우리나라 재벌의 부끄러운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한편 이런 가운데 임원 보수 공개대상에 ‘5억원 이상 미등기임원’도 포함되는 내용의 법안이 국회에 제출돼 관심이 집중된다. 

새정치민주연합 민병두(서울 동대문을) 의원은 임원보수 공개대상을 ‘5억 이상 미등기 임원’도 포함하는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한다고 2일 밝혔다.

법안이 국회 문턱을 넘으면 등기이사에 오르지 않은 대기업집단 오너 일가는 대부분 공개대상에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

법적 책임에서도 벗어나고, 연봉공개도 피할 수 있는 ‘미등기임원’으로 갈아타며 꼼수를 부린 오너 일가가 과연 이번엔 어떤 ‘묘수’로 위기를 벗어날 지 초미의 관심이 집중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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