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강헌.
[시사위크=권정두 기자] 1988년 이맘때 서울은 88올림픽의 진한 여운에 물들어 있었다. 끔찍한 전쟁을 치른 나라, 지독하게 가난했던 나라가 어느덧 올림픽을 개최해 4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은 많은 국민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기 충분했다. 1970~80년대 우리가 일궈낸 눈부신 성장을 입증할 가장 확실한 ‘이벤트’였던 셈이다

하지만 1988년 오늘, 그 여운을 산산조각 낸 사건이 시작됐다.

지강헌. 그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지 못한 채 거리를 나돌았다. 그런 그가 도둑이 된 것은 결코 정당화할 순 없을지라도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남의 집과 경찰서를 오가던 지강헌은 550만원을 훔치다 붙잡혀 17년 옥살이를 선고받았다. 징역 7년에 보호감호 10년을 선고받은 것이다. 서슬 퍼런 1980년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반면, 법 위에 군림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자 이번 사건의 도화선이 된 것이 바로 전경환. 전두환의 동생이다. 1988년 3월, 전경환은 100억원대의 횡령·탈세 혐의로 기소됐다. 하지만 같은 해 9월 열린 1심에서 그에게 내려진 형량은 징역 7년과 벌금 및 추징금이었다. 100억원대 횡령·탈세를 저지른 전경환이 550만원을 훔친 지강헌보다 더 짧은 옥살이를 선고받은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한 지강헌 등 수감자들은 분노했다. 그리고 탈주를 계획했다. 디데이는 1988년 오늘이었다.

지강헌을 비롯한 미결수 12명은 1988년 10월 8일 영등포교도소에서 공주교도소로 이송되는 과정에서 탈주를 감행했다. 올림픽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았던 서울은 물론 전 국민을 얼어붙게 만든 사건이었다. 언론에서는 앞다퉈 이 소식을 전했고, 흉악범이라는 표현도 빼놓지 않았다. 특히 지강헌은 교도관의 권총을 소지한 것으로 알려져 더욱 공포의 대상이 됐다. 허나 이들의 실상은 대부분 흉악범과는 거리가 먼 ‘잡범’이었다.

▲ 지강헌과 인질.
탈출한 이들 중 5명은 당일 붙잡혔다. 또 다른 2명 역시 일주일 만에 검거됐다. 그러나 나머지 5명은 좀처럼 경찰의 손아귀에 잡히지 않았고, 시민들의 불안감은 높아져만 갔다.

이후 지강헌과 강영일, 안광술, 한의철 등 4명은 10월 15일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의 한 가정집에 침입했다. 그리고 이튿날인 16일,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과 인질극 대치를 시작했다.

일요일에 벌어진 인질극은 TV를 통해 생중계되기도 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탈주범들의 가족은 눈물로 자수를 호소했다. 하지만 이들은 좀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을 버린 사회와 또 다시 타협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들은 불공평한 세상을 향해 날선 비판과 일갈을 서슴지 않았다. 배운 게 많지 않은 이들이었지만, 세상을 통해 배운 것은 분명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그것이다.

결국 이들의 ‘발악’은 비극적으로 막을 내렸다. 안광술, 한의철은 인질극 과정에서 권총으로 자살했고, 지강헌 역시 자살을 기도한 뒤 경찰특공대의 총을 맞고 병원에서 숨졌다. 인질극 과정에서 밖으로 나왔던 강영일 만이 살아남았다. 이때 지강헌은 35세, 나머지 세 명은 모두 20대 초반의 나이였다.

이른바 ‘지강헌 사건’으로 불리는 이날의 비극은 지금도 꽤나 유명한 사건으로 회자된다. 특히 지강헌이 비틀즈의 ‘홀리데이(Holiday)’ 테이프를 요구한 뒤 노래를 틀어놓고 자살을 기도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일화다. 또한 이 사건은 지난 2005년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지강헌 사건’은 어느덧 26년 전 이야기가 됐다. 그러나 26년 전 지강헌의 외침이 여전히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많다는 점은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우리 앞엔 또 다른 지강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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