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부소장.
[시사위크] 새해 벽두 핵·미사일 도발로 국제사회를 뒤흔들던 김정은의 행보가 암초를 만났다. 미국 등 국제사회가 초강도 대북제재의 칼날을 빼들었고, 중국도 여기에 동참한 것이다. 앞서 3차례의 핵실험과 5차례 장거리 미사일 도발 때와는 차원이 다른 대북압박 그물이 촘촘하게 던져졌다. 특히 김정은의 돈줄을 죄는데 초점이 맞춰지면서 관심은 평양 권력의 핵심부 동향에 맞춰지고 있다.

일단 북한이 상당히 당혹해하고 있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1월 초 4차 핵실험과 한 달 뒤 광명성 로켓 발사를 감행하면서 예상했던 수순보다 훨씬 빠르고 일치된 대북 국제공조가 취해지고 있다는 점에서다. 북한 관영 선전매체들은 뾰족한 대응책을 내놓지 못한 채 거친 대남비방과 미국에 대한 적대적 입장표명에 주력하는 분위기다.

북한군 최고사령관인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도 위축된 모습을 드러냈다. 핵 항모와 스텔스 전투기의 한반도 전개 같은 상황에 위기감을 느낀 듯 잠시 동선 노출을 중단하는 징후도 포착됐다. 공개 활동을 재개했지만 평양 집무실 인근과 근교 군사시설 방문에 치중하고 있다는 게 우리 정부 당국의 설명이다.

특이한 건 김정은까지 직접 나서 체제결속을 호소하고 있는 대목이다. 김정은은 청년·학생들에게 감사문까지 내고 군 입대 탄원을 독려하고 있다. 그는 27일자 서한에서 “(최고사령부의 중대 성명 발표 후) 이틀 동안에 전국적으로 150여만 명에 달하는 일꾼들과 근로청년들, 대학·고급중학교 학생들이 인민군대에 입대와 복대를 열렬히 탄원했다”고 주장했다.

집권 5년차에 접어든 김정은은 앞서 몇 차례 대남 도발을 벌이고 군사적 긴장을 조성해왔다. 지난해 8월 북한군의 목함지뢰 도발에 대해 발뺌하면서 ‘최후통첩’ 운운하는 위기를 조성했다. 그러다가 갑작스레 회담을 요청한 뒤 도발에 대해 사과하는 제스처를 취했고 대북 심리전 방송의 중단을 얻어냈다. 이어 관영 선전매체를 동원해 마치 김정은의 대화제의로 한반도가 전쟁 위기에서 평화를 찾은 것처럼 호도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초인 2013년 봄에도 이런 패턴은 나타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북한의 뜻대로 호락호락하지 않을듯하다. 무엇보다 김정은의 핵·미사일 도발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는 국제사회의 공감대가 그 어느 때 보다 강하다. 또 유엔의 대북제재 방안에 중국까지 가세함으로써 상황이 엄중해졌다. 남북 간 대화를 통해 풀어나가기엔 판을 너무 크게 벌렸다는 얘기다.

김정은 체제 들어 핵과 미사일 도발이 처음은 아니다. 이번에 유독 한국과 미국 등 국제사회가 단호한 입장을 보이면서 북한의 도발 본능을 잠재워버릴 강도 높은 대북제재 방안을 강구하고 있는 건 김정은이란 인물 때문이다. 32살의 젊은 최고지도자는 아버지인 김정일보다 훨씬 호전적인 대남인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또 좌충우돌하는 비현실적 정책추진에 노동당과 군부의 핵심간부를 수시로 숙청·처형하는 공포정치를 구사하고 있다. 통치의 불안정성이 증폭됐다는 판단에 따라 한·미 당국과 국제사회가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에 미칠 영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대책마련에 나선 것이다.

이런 국면을 볼 때 남북관계가 다시 대화와 화해협력 쪽으로 가닥을 잡기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무엇보다 북한의 태도변화가 우선시돼야 한다는 측면에서다. 그 핵심은 비핵화, 즉 핵 포기다. 김정은 체제의 도발적이고 돌출적인 행태로 볼 때 핵·미사일 문제와 관련해 태도의 변화를 보이고 개혁·개방 쪽을 선택할 가능성은 낮다.

우려되는 건 이런 암담한 상황 때문에 통일에 대한 기대나 준비 작업이 도중하차하거나 차질을 빚는 경우다. 통일에 대한 희망마저 접어버리면 안 된다는 측면에서다. 통일준비는 북한의 호전적 태도나 한반도의 불안정한 정세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추진돼야 하는 과제다. “위기 속에 기회가 있다”는 격언을 되새겨 볼 필요도 있다. 북한의 군사적 도발에는 철저히 대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통일에 대한 채비를 차근차근 해나갈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사실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통일 대한민국’을 논하는 것 자체를 금기시하려는 듯한 분위기가 있는 게 사실이다. 실질적으로 가장 실현 가능성이 높은 ‘대한민국이 북한을 흡수하는’ 통일방식에 대해 언급하고 대비하는 걸 냉전적 사고로 치부해온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북한 김정은 체제의 급변사태를 전제로 통일문제를 다루거나 논의하는 건 매우 조심스럽고 민감한 문제가 되어버렸다. 북한의 체제변화 문제도 마찬가지다.

통일은 우리 경제와 기업이 새로운 도약을 꿈꿀 수 있는 기회이자 블루오션이라 할 수 있다. 분단으로 인한 유형·무형의 사회경제적 비용 부담을 해소하고, 분단 유지에 투입해야 했던 돈과 사람을 경제로 돌리는 과정이다. 제주에서 백두산 삼지연을 잇는 국내선 항공노선이 생겨 통일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여름에는 삼지연의 자연휴양림에서, 겨울에는 따뜻한 제주에서 휴가를 즐기는 날이 올 수 있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초코파이와 라면 같은 식품이 2,400만 북한 주민을 새로운 시장 고객으로 맞고, 스타킹과 일회용 생리대, 콘돔 등이 불티나게 팔리는 때가 온다면 어떨까.

어떤 국가나 체제의 내구성을 논리적 추론이나 공식에 의해 예측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로 보인다. 더욱이 북한 같은 폐쇄체제는 권력내부의 역학관계나 최고지도자의 의사결정 구조 등을 평가할 변수를 파악하기 쉽지 않다. 지금 북한 최고지도자의 통치와 리더십은 불안정해보인다. 김정은은 입대 탄원 감사문에서 “적들은 우리 인민을 몰라도 너무나 모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정말 북한 주민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국제사회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지 잘 모르는 것 같다.

어떤 국가체제의 변동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뜻밖의 요인에 의해 닥칠 수 있다. 독일 통일도 그랬다. 단단한 채비를 해둬야 하는 이유다. 동서독 시기 분단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 문을 두고 독일의 폰 바이체커 대통령은 “브란덴부르크의 문이 닫혀있는 한 통일의 문을 항상 열려있다”고 설파했다. 통일을 향한 이런 정치지도자 철학과 국민들의 결집된 의지가 26년 전 독일통일을 일궈낸 것이다. 북한의 도발과 위협으로 봄이 오지 않을 것처럼 어수선하지만 통일에 대한 비전 제시와 준비 작업은 결코 멈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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