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장.
[시사위크] 이달 중순 유엔 인권위원회 회의 취재차 스위스 제네바의 유엔 유럽본부를 다녀왔다.

이곳에서는 유엔 회원국은 물론 국제 NGO와 인권운동가들은 북한의 인권상황에 대해 큰 우려를 나타내며 김정은 정권의 공개처형과 탈북자 강제부속과 처벌, 그리고 정치범 수용소 등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국가별 3분간의 릴레이 발언도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은에 대한 성토 일색이었다. 같은 민족으로서 부끄럽고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또 북한 인권문제의 근본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해야 할 시기라는 생각을 굳히게 됐다.
  
집권 5년차를 맞은 북한 지도자 김정은은 국제사회에 ‘괴물’로 인식되고 있다. 전대미문의 3대 세습을 통해 절대 권력을 거머쥔 32살의 김정은은 국제사회의 개혁·개방 기대에 부응하기는커녕 역주행을 일삼고 있다. 최근의 핵·미사일 도발이나 극도에 달한 대남 군사위협 발언은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폭주기관차를 연상케 한다. 유엔과 국제사회가 인권문제를 화두로 김정은의 국제형사재판소(ICC) 제소 문제까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나선 건 이런 분위기가 어우러진 결과라 할 수 있다.

제네바 유엔본부에 머무는 틈틈이 바로 옆 웅장한 레만호 산책길을 걸으며 김정은 체제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가졌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김정은의 이 같은 권력도취와 폭정, 그리고 비뚤어진 리더십이 잉태된 것일까 하는 데 초점이 모아졌다. 성장과정에서 제대로 형성되지 못하고 헝클어진 인식이나 가치관이 지나치게 젊은 나이에 절대권력을 거머쥐는 과정과 맞물리면서 사단이 벌어질 것이란 생각이다.

공교롭게도 스위스는 김정은이 10대 시절 조기유학을 위해 홀로 머물렀던 장소다. 그는 베른의 한 국제학교에서 5~6년 가량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김정은의 집사 역할을 하며 챙겼던 이수용 스위스 주재 대사는 지금 북한의 외무상으로 일하고 있다. 그 시기 김정은은 기사가 딸린 고급승용차를 타고 등하교를 했고, 이수용을 비롯한 대사관 직원들이 수발을 들었다고 한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김정은은 스위스에서 보내며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를 돌아봤다. 이 때문에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 이후 김정은이 집권하면서 변화가능성에 관심이 쏠렸다. 해외유학파인 김정은이 뭔가 새로운 정책노선을 채택할 것이고 무엇보다 개혁·개방을 통해 국제사회의 흐름에 동참할 것이란 측면에서였다.

집권 초기 그가 모란봉악단 공연 무대에 미키마우스와 백설공주 캐릭터를 등장시키고, 여가수들이 북한의 수준에서 볼 때 파격적인 노출을 드러낸 옷차림으로 노래하는 걸 두고 “김정은이 뭔가 차원이 다른 통치행보를 보일 것”이란 기대가 나온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김정은은 선대 수령이라 할 김일성·김정일보다 더 전제군주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고위 간부들에 대한 공개처형과 북한 선전매체를 통해서도 감지되는 권력도취적인 행보가 그것이다. 민생을 도외시한 채 특권층을 위한 과시적 자원분배나 자신의 기호에 맞춘 건설 사업에 치중해왔다.

특히 스위스 유학 중 자신이 경험했던 레저·위락 시설 공사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 게 특징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위스의 워터파크인 알파마레를 본 따 평양에 문수물놀이장을 만들었다. 그가 유럽 여행 중에 방문했던 파리 세느강의 선상유람선인 바토무슈와 같은 레스토랑 관광선을 대동강에 띄우기도 했다. 군용 말을 키우는 부대에 가서는 청소년과 노동자의 건강관리에 좋으니 승마를 권장하라며 미림승마구락부로 이름을 바꾸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강원도 원산 인근에 마식령스키장을 건설토록 한 것은 이런 움직임의 절정이라 할 수 있다.

김정은은 이러한 위락시설에 때로는 만족스런 반응을 보이기도하고, 어떤 때는 자신이 보고 즐겼던 것과 북한의 수준 차이에 절망한 때문인지 격분하고 공사관계자를 숙청하는 분노조절장애를 드러내기도 한다.

10대 시절을 부모를 떠나 해외에서 황태자로 살던 김정은이 제대로 된 인격형성의 기회를 가지 못했을 것이란 지적도 제기된다. 빅터 차 조지타운대 교수는 그의 저서 ‘불가사의한 국가’에서 김정은이 스위스 유학시절 일그러진 인성을 드러낸 장면을 기술하고 있다. 같은 학교의 한국인 여학생 부모가 학교모임에서 만난 김정은에게 “어머니는 어디 계시니?”라고 묻자 “우리 엄마, 아빠 여기 없어!”라며 반말투로 거칠게 대답했다는 일화다.
 
26살에 후계자로 지명된 막내아들 김정은에게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제왕학을 가르치려 서둘렀다. 하지만 이미 김정일의 건강은 심각한 상황이었다. 통치 노하우 등을 속도전 방식으로 전수하려했지만 미처 다 가르치지 못한 채 급사했다. 김정일은 물론 할아버지인 김일성도 저승에서 김정은의 미숙하고 갈팡질팡하는 통치행태를 지켜보며 땅을 치고 있을지 모른다.

더욱 우려의 시선을 보낼 세력은 북한 정권 수립에 핵심역할을 한 이른바 혁명 1세대 노간부들일 수 있다. 무자비한 숙청이 이어지는 공포정치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숨죽이고 있지만 “이래서는 안 되는데…”라는 생각을 할 가능성이 높다.

잠재적 불만세력들이 늘어가고 있고, 경우에 따라 세력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노동당과 군부의 핵심 세력이 자신들의 존재가 위협받는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면 생존을 위한 저항차원에서 모종의 반기를 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레만호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다보면 작은 섬 같은 곳에 서있는 장자크 루소의 동상과 만나게 된다. 스위스 태생인 그는 봉건적 전제 지배를 격렬하게 비판하고 시민의 자유를 강조했다. 그리고 출신에 관계없이 인간은 평등하다는 사상을 갖고 있던 인물이다. 유학생 김정은이 루소의 그런 생각을 조금이나마 체득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다. 김정은이 심취했어야 하는 건 NBA의 농구 스타나 유명 관광지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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