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세기말의 사랑’으로 돌아온 임선애 감독. / 엔케이컨텐츠
영화 ‘세기말의 사랑’으로 돌아온 임선애 감독. / 엔케이컨텐츠

시사위크=이영실 기자  지난달 24일 개봉한 ‘세기말의 사랑’(감독 임선애)은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던 1999년, 짝사랑 때문에 모든 걸 잃은 영미(이유영 분)에게 짝사랑 상대의 아내 유진(임선우 분)이 나타나며 벌어지는 이상하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웰메이드 데뷔작 ‘69세’로 유수의 영화제를 휩쓸며 한국 영화계가 주목하는 여성 감독으로 떠오른 임선애 감독의 차기작으로,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파노라마 섹션을 통해 첫선을 보인 데 이어 제49회 서울독립영화제 페스티벌 초이스 부문에 초청돼 관객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두 번째 장편 연출작으로 돌아온 임선애 감독은 ‘69세’에 이어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예상치 못한 사랑스러움과 재기발랄한 매력으로 관객을 매료한다. 혼란과 희망의 기운이 공존했던 세기말을 배경으로, 도저히 좋아할 수 없었던 나 자신의 미운 구석마저 기꺼이 끌어안게 되는 두 여성의 성장을 따스한 시선으로 그려내 웃음과 공감, 용기와 위로를 안긴다.  

임선애 감독은 최근 <시사위크>와 만나 개봉 소감부터 기획의 출발, 각색 과정, 연출 포인트 등 ‘세기말의 사랑’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전했다. (*해당 기사에는 영화에 대한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독특하고 사랑스러운 매력의 ‘세기말의 사랑’. / 엔케이콘텐츠
독특하고 사랑스러운 매력의 ‘세기말의 사랑’. / 엔케이콘텐츠

-관객과 만나는 기분은.

“영화가 개봉하면 내 손을 떠난 느낌이 든다. 영화를 본 관객들이 각자 품고 있는 생각과 해석이 다양하고 이런 의미까지 읽어주셨구나 싶은 부분들까지 알아주셔서 나 역시 남의 영화 보듯 재밌게 즐기고 있고 즐기려고 노력한다. 이런 시간이 정해져 있잖나. 극장에서 내려오기 전까지 내가 영화를 만들 때 느낀 힘듦을 잊게 해주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남은 시간을 즐겨야겠다 생각하고 있다.”

-데뷔작 ‘69세’가 워낙 호평을 받아서 차기작에 대한 부담감도 컸을 것 같다. 

“없다면 거짓말이다. 내가 만든 영화가 경쟁상대가 되는 느낌이랄까. 처음은 미흡하고 실수하기 마련이다. 다음에 더 잘해야지 하는 마음을 먹잖나. 무슨 일이든 두 번의 기회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기회가 왔고 영화를 만들었는데 이 영화가 어쩌면 마지막 작품이 될 수 있다는 마음이 들더라. 첫 작품은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것 안에서 해냈고 좋은 평가도 받아서 다행이라는 마음이었다면 이번에는 복합적이었다. 이게 끝일까, 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까에 대한 염려가 있어서 평가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다. 쓰디쓴 평들도 있지만 그래도 영화를 사랑스럽게 봐주신 것 같아 안도감을 느낀다. 이 영화는 남들은 보지 못하는 서로의 사랑스러운 부분, 인간에 대한 아름다움, 반짝거림 같은 것을 발견해 주는 작품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좋아해 주는 분들도 굉장히 좋은 분들이라는 생각이 든다.(웃음) 어떤 평가든 오래 간직하고 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10년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 작품으로 쓴 시나리오였다고. 어떻게 이 이야기를 떠올리게 됐나.  

“‘69세’도 그렇고 경험 안에서 녹아 나오는 이야기를 썼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여성으로 살아오면서 겪은 문제의식 갖고 있었고 친구들도 같은 경험을 많이 했더라. 그래서 자연스럽게 마치 내 이야기인 것처럼 느껴져서 쓴 것처럼, 이 이야기도 주변에 유진과 닮은 분으로부터 시작됐다. 근육병을 갖고 있고 예쁘면서 성격도 까탈스러운 사람.(웃음) 어렸을 때부터 그분을 보면서 장애인에 대한 선입견이나 편견에 대한 각성이 일어났다. 기존에 장애인을 소재로 한 주인공인 영화들 대부분 장애인이 장애를 극복하는 이야기라든가 어려운 여건 속 성공하는 이야기다. 또 장애는 있지만 굉장히 부자라든가 상대역은 가난하고 그런 도식적인 설정을 갖고 간다. 그런데 장애인도 평범한 소시민이고 자신의 취향이나 욕망, 불평불만을 서슴없이 말하는 이들도 있는데 왜 그런 이들은 다루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게 됐고 거기에서 출발해 ‘비장애인 여성이 장애인 여성을 질투하는 이야기’를 써보면 재밌겠다는 생각으로 지금의 이야기가 나오게 됐다.”

-각색 과정도 궁금한데. 

“처음에는 ‘예쁜 여자’라는 제목이었다. 비중으로 보면 유진이 조금 더 주인공에 가까웠다. 그런데 아무리 가까운 분을 모델로 했다고 하더라도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너무 영화적인 허구나 피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서 그 인물이 화자가 돼 이야기를 쓰는 것보다 그 인물의 곁에 있는, 관객의 눈높이와 더 맞는 이가 따라가는 게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영미의 분량을 늘렸다. 굳이 따지자면 분량도 반반이고 두 사람이 수평적으로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서로의 삶을 어떻게 목격하게 되는지 나란히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렇게 각색 방향을 잡아나갔다.” 

유진과 영미를 연기한 임선우(왼쪽)와 이유영. / 엔케이콘텐츠
유진과 영미를 연기한 임선우(왼쪽)와 이유영. / 엔케이콘텐츠

-영미와 유진을 어떤 인물로 그리고 싶었나.

“두 인물 모두 외부에서 봤을 때는 결핍도 있고 약간 이상해 보이기도 하고 친해지기 어려운 느낌일 수 있는데 그것은 보는 사람의 기준이지 그 인물 자체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결핍이나 결함에 대해 자격지심을 가진 사람도 아니다. 우선 영미는 영화 초반 사람들이 ‘세기말 왔다’고 할 때 머플러 안으로 고개를 숙이지만 주눅 들어 있지 않다. 욕을 하기도 하잖나. 단지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게 딱 영미라고 생각했다. 유진은 ‘내가 호구를 부리는 거야’라는 마음으로 산다. 때로는 위악을 부리기도 하지만 일종의 자기방어기도 하다. 어쩌면 하나의 가면을 쓰고 사는 모습이기도 하다. 나도 어떻게 보면 사랑에 있어서 호구 같은 인물인데, ‘세상에 나 같은 사람도 있구나, 그렇다면 살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런 시선으로 캐릭터를 담았다.”

-전작도 그렇고 소외된 인물들을 다른 시각으로 들여다보고 다른 방식으로 그려내는 감독만의 시선이 느껴진다.     

“캐릭터 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다. 남들이 그리지 않은 각도에서 인물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69세’ 효정도 노년 여성, 돌봄 노동을 하는 이라면 옷을 세련되게 갖춰 입지 않을 것 같은 선입견이 있잖나. 피해자임에도 필요 없는 죄책감을 갖게 되고 결국은 자신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구나,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와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구나 느꼈을 때 당당함 같은 것들이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그 인물을 그렇게 그렸다. ‘세기말의 사랑’ 같은 경우도 이 사람들이 원래 이상하고 특이해서 대사를 일부러 웃기게 쓴 것은 아니었다. 배우들이 조금 더 입체적으로 만들어준 게 사실이다. 개성 있는 외모의 비장애인 여성, 연예인 뺨치게 예쁜데 성격이 까탈스러운 장애인 여성, 마냥 순애보적인 남자라고 했을 때 어떤 영화에서도 나올법한 캐릭터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면면에는 그 사람의 원래 성정이 드러나길 바랐다. 솔직하고 계산적이지 않고 음흉하지 않은 사람들. 또 그들이 하는 사랑. 첫 프리미어 상영을 몬트리올 판타지영화제에서 했는데 어쩌면 이런 부분이 판타지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할 수 없는 대리만족 같은 게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들이 뱉어내는 말, 대사들도 예상을 빗나가는 게 많았다. 감독만의 방법이 있나. 

“대사를 쓸 때 비틀어서 하는 걸 좋아한다. 예를 들어 너무 그리운 사람을 만났다고 한다면 ‘보고 싶었어’라고 자신의 마음을 직관적으로 표현할 수 있지만 그 말이 너무 커서 차마 하지 못하고 아주 일상적인 말을 내뱉기도 하잖나. 그 순간 원래 해야 할 말을 비트는 것, 그게 방법이라면 방법이랄까. 그런 걸 찾는 것 같다.”

이유영이 완성한 ‘세기말의 사랑’ 영미 스틸. / 엔케이콘텐츠
이유영이 완성한 ‘세기말의 사랑’ 영미 스틸. / 엔케이콘텐츠

-어떤 상처나 사건을 자극적으로 전시하거나 소비하지 않는 연출력도 돋보인다. 감독이 추구하는 방향일까. 

“‘69세’ 첫 장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준다. 기존 성폭력 사건을 다룬 영화를 보면 피해를 당하는 장면을 왜 굳이 그렇게까지 재현할까, 고통포르노 같은 느낌으로 보였다. 그걸 보는 관객도 일종의 간접 피해를 입는 느낌도 들었다. 그런 방식이 아니어도 고통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또 사운드만으로 저 안에 있는 인물이 느낄 불안감과 공포감, 긴장감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그렇게 되면 효정의 마음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영미나 유진도 겉으로 보기엔 연민이 들 수 있지만 당사자가 자기 삶을 비관해서 힘들다, 고통스럽다고 하는 걸 보여주기만 하면 다른 미디어에 나왔던 그 인물과 뭐가 다를까 싶었다. 또 그렇게 사회적 약자는 항상 저렇게 고통스럽고 불편하고 힘들어라고 각인되는 거다. 그들이 꼭 그렇지만은 않잖나. 매일매일 어떤 순간 안에서 즐거운 일도 있고 웃는 순간도 있고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도 있다. 그래서 고통을 표정이나 눈물 이런 걸로 전시하기보다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삶 자체를 보여주는 게 관건이었다. 일부러 그 사람들의 삶도 유쾌하고 행복해라고 알려주려고 함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의 하루하루를 보여주는 게 중요했다.”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그렸다. 때로는 그 사랑이 올바르지 않은 방향으로 가기도 한다. 사랑의 어떤 면을 보여주고 싶었나.  

“호구는 자신이 호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남들이 그 사람을 호구로 보는 거다. 자신도 호구라고 생각하면 그 짓을 하겠나.(웃음) 영미가 도영의 공금횡령을 갚아준 것은 단순히 도영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도영이 잘리면 그를 보지 못하게 되고 경리인 자신에게도 관리를 못한 책임이 있기 때문에 직장을 잃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영미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만드는 거다. 도덕적으로는 문제가 될지 몰라도 누구도 손해 끼치지 않았으니 그런 방조 정도는 귀엽게 봐줄 수 있지 않을까. 유진도 위장결혼을 택한 것은 도영을 배려하기 때문이다. 도영이 자신과 결혼하면 평생 돌봐야하고 그의 인생을 붙잡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의 명분을 만들어 준 거다. 도영도 실제로 유진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곁에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을 거다. 모두 일종의 거짓말을 한 거다. 자신의 진심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명분을 하나씩 만들어놓고 했던 사랑이 끝내는 그 진심이 드러나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앞날이 더 기대되는 임선애 감독. / 엔케이콘텐츠​
앞날이 더 기대되는 임선애 감독. / 엔케이콘텐츠​

-밝게 웃는 영미의 미소로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엔딩에 대해서는 어떤 고민을 했나.  

“색감적으로 보면 흑백이었다가 컬러로 나오고 끝까지 컬러다. 새천년이 되면서 영미가 많은 짐을 덜어내고 불안하지만 설레는 삶을 살아가며 다채로운 인물을 만난다는 게 이 영화의 이야기다. 영미는 어떻게 보면 음침하고 피곤한 삶을 살다가 마지막 도달한 곳에서 세상이 이렇게 생겼구나, 햇빛이 이렇게 따뜻했구나, 사람들은 저렇게 살고 있구나 등을 느끼고 바라보게 바뀌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마지막 장면은 진짜 햇살을 담았다. 조영되지 않은 조명이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영미의 투명한 얼굴과 눈에 햇빛이 떨어져 있는 모습을 담아내고자 했다. 또 유진의 마지막 장면 구도와 데칼코마니로 담았다. 유진은 왼쪽에, 영미는 오른쪽에 얼굴을 담았다. 굉장히 의도한 장면이다.(웃음)”

-엔딩 크레딧 ‘스페셜 땡스 투’에 이옥섭‧윤단비‧김초희‧윤가은 등 한국영화의 미래를 이끌 여성감독들의 이름이 눈길을 끌더라. 서로의 존재가 어떤 힘과 용기가 되고 있나. 

“코로나19로 인해 큰 영화들이 개봉을 기다리고 있을 때 극장을 지킨 것은 작은 영화들이었다. 그러면서 여성감독이 만든 다양한 영화들이 많이 나왔다. ‘69세’도 그래서 관심을 받았던 것도 같다. 그 무렵 준비했던 감독님들과 행사장이나 영화제에서 만나게 되면서 대화를 많이 나눴는데 외모나 성격이 다 다르지만 하고 있는 고민은 정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더라.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동료 감독을 만나니 너무 위안이 됐다. 그렇게 친해져서 가끔 영양제도 공유하고 조언도 해주고 좋은 영화 추천도 하면서 비슷한 고민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다. 이번 촬영할 때도 커피차도 보내주면서 응원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스페셜 땡스 투’ 가장 첫줄에 그들을 올리고 싶었다.”

-앞으로는 어떤 이야기를 할 계획인가.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써놓은 아이템이나 결은 비슷하다. 사회에서 소외된 약자가 주인공인 경우가 많다. 다음 작품이 뭐가 될지 확실히 정해진 것은 아니고 내가 쓴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 안에서 내가 그동안 표현했던 인물을 그리고 다루는 방식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게 계속 만들어가고 싶다.”

저작권자 © 시사위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