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상호 감독이 넷플릭스 영화 ‘정이’로 돌아왔다. / 넷플릭스
연상호 감독이 넷플릭스 영화 ‘정이’로 돌아왔다. / 넷플릭스

시사위크=이영실 기자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상상력으로 자신만의 세계관을 확장해가며 전 세계 팬들을 매료해 온 연상호 감독이 또 한 번의 도전을 택했다. 한국영화에서는 아직 낯선 SF 장르에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를 더한 넷플릭스 영화 ‘정이’를 통해서다. 연 감독은 “어렵지 않지만 곱씹다 보면 생각할 거리가 많은 영화가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오는 20일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에 공개되는 ‘정이’는 급격한 기후변화로 폐허가 된 지구를 벗어나 이주한 쉘터에서 발생한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전설적인 용병 정이(김현주 분)의 뇌를 복제, 최고의 전투 A.I.를 개발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좀비가 KTX에 탄다’는 신선한 발상 속에 긴장감과 가족애를 녹여낸 ‘부산행’, 아포칼립스와 좀비가 결합된 ‘반도’로 ‘한국형 좀비 장르물’의 이정표를 세우고, 초자연적인 현상과 사후 세계에 대한 인간의 공포와 믿음에 대한 질문을 던진 ‘지옥’으로 복합장르의 재미를 성공적으로 구현한 연상호 감독은 ‘정이’를 통해 22세기 미래, A.I. 전투용병의 뇌복제 실험이라는 신선한 소재로 한국적이면서도 새로운 세계를 펼쳐 보인다. 

연상호 감독은 지난 18일 <시사위크>와 만나 ‘정이’의 시작부터 캐스팅 과정, 촬영 비하인드 등 다양한 이야기를 전했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고(故) 강수연과의 추억도 들을 수 있었다.  

-공개를 앞둔 소감은.  
“‘정이’ 촬영 끝난 게 작년 1월에 끝났으니까 거의 1년 정도 시간이 흘렀다. 보통 촬영을 끝내고 후반 작업을 4~5개월 하는데, ‘정이’는 10개월 정도 후반작업을 했다. 그 사이 강수연 선배가 돌아가신 큰 사건도 있었고… 이렇게 오랫동안 후반작업을 하고 붙잡고 있다가 공개를 하게 돼서 감회가 새롭다. 설레기도 하다.”

‘정이’를 유작으로 남기고 떠난 고 강수연. / 넷플릭스
‘정이’를 유작으로 남기고 떠난 고 강수연. / 넷플릭스

-고 강수연(서현 역)이 무려 12년 만에 택한 상업영화였다. 어떻게 함께하게 됐나.  
“애초 ‘정이’ 대본을 쓸 때 흔히 말하는 신파? 눈물을 흘릴 수 있는 멜로에 SF를 결합하면 어떨까 먼저 생각했다. 요즘 영화에서 일종의 손쉬운 선택이나 조롱으로 비치기도 하는데, 당시 그런 신파적인 것에 빠져있었다. 이 좋은 걸 왜? 싶었다. 또 외국에서는 그걸 신기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막상 대본을 쓰고 나서는 나 자신도 확신이 없었다. 예산이 적은 것도 아니고 여러 이유 때문에 영화로 만들기는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잊고 지내다가 ‘지옥’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정이’ 대본을 다시 읽어봤다. 고전적인 멜로와 SF가 결합된 영화에 되게 고전적이면서 우아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강수연 선배가 주연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갑자기 이 영화가 너무 하고 싶어졌다. 

넷플릭스와 먼저 이야기를 했고, 강수연 선배를 캐스팅하는 큰 산이 남아있었다. ‘지옥’을 같이 한 양익준이 강수연 선배와 연이 있어서 연락처를 받아 장문의 메시지를 썼다. 어떻게든 설득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과거 스쳐지나갈 때 만났던 인연부터 해서 아주 구질구질하게 메시지를 보냈는데 분명 확인했는데 답이 없더라. 큰일 났다,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다 또 강수연 선배와 지금까지도 친하게 지내고 있던 전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에게 연락해서 부탁을 했고 그렇게 첫 통화를 했다. 나중에 메시지를 왜 ‘읽씹’했느냐고 물어봤더니 스팸인 줄 알았다고 하더라. 이 사람이 나한테 보낼 리가 없는데 장난문자인 줄 알았다고 하더라. 처음 만난 날 기억이 생생하다. 강수연 선배가 워낙 술을 잘 드시는 걸로 유명해서 첫 만남부터 정신줄을 놓으면 안 되겠다 싶어 온갖 술 깨는 약을 다 먹고 갔다.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눴는데 강수연 선배가 너무나 쉽게 ‘한 번 해보자’고 하셨다. 맥이 풀려서 만취가 됐던 기억이 난다.(웃음)” 

-현장에서 고 강수연은 어떤 배우였나. 
“호기롭게 강수연 선배를 캐스팅했지만 한편으론 걱정되기도 했다. 예전 영화 현장과 너무 다르고 나도 새로운 장르였기 때문에 전과 너무 다르니까 많이 낯설어 하면 어떡하지 걱정했다. 또 강수연 선배가 어떤 분인지 사실 모르는 상황이라 예민할까 생각도 했다. 그런데 굉장히 놀랐다. 예전에는 배우가 표현하는 게 미덕이었지만 ‘정이’는 표현보다는 절제하는 게 핵심이라서 ‘아무것도 하지 말아 주세요, 제발 절제해 주세요’라고 했었는데, 정말 미세하게 안으로 품으면서 하다가 마지막 한 번에 폭발시키는 것을 보면서 전율이 돋았다. 현장을 너무너무 좋아하셨다. 영화계 대선배인데 막내 스태프 같은 경우는 잘 모를 수 있잖나. 그런데 그런 스태프들까지 정말 영화계 큰 엄마처럼 다 감싸고 다독여주고 하면서 현장을 끌고 가셨다. 현장을 즐거워하고 사랑했다. 그동안 영화를 안 찍고 어떻게 버티셨지 생각이 들 정도로 현장을 너무 사랑하셨다. 전설의 명배우답다는 생각을 했다.” 

연상호 감독이 김현주(사진)을 향한 강한 신뢰감을 드러냈다. / 넷플릭스
연상호 감독이 김현주(사진)을 향한 강한 신뢰감을 드러냈다. / 넷플릭스

-‘지옥’에서 함께 한 김현주를 ‘정이’로 택했다. 캐스팅 이유는. 
“나도 CG가 들어간 영화를 꽤 많이 해왔다고 생각하는데, ‘정이’는 다른 차원의 영화였다. 전혀 예측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강수연 선배와도 처음 작업이었고 너무 다른 환경이었기 때문에 믿고 맡길 수 있는 배우가 ‘정이’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작업하다 보면 그 배우에 대해 더 알게 되잖나. 그러다 보면 이 배우가 보여줄 게 더 많다는 것을 현장에서 제일 많이 느끼기도 한다. 누군가의 엄마이면서 전사인 여성, 그 캐릭터를 가장 잘 할 수 있는 배우, 현장에서의 신뢰를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김현주가 떠올랐다. 액션도 ‘지옥’ 당시 트레이닝을 하면서 이미 준비가 돼 있었다. 작업을 하면서 점점 더 확신이 들었다.”

-SF 장르였지만, 고전적인 느낌이 강했다. 그렇게 설정한 이유가 있나.  
“얼마 전에 둘째가 돌이라서 돌잔치 겸 가족들과 식사를 했는데, 장인어른께 ‘정이’ 뒷부분을 보여드렸더니 ‘너무 허무맹랑한 거 아니냐’고 하시더라.(웃음) 그만큼 한국에서는 SF 장르가 낯설다. 감독인 나도 한국 사람이 나오는 한국말 하는 로봇이 낯선데, 대중은 더 그럴 거다. 내가 SF를 택한 것도 이 낯섦을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전달할 수 있을까 싶은 마음도 컸다. 모두가 보편타당하게 공감되는 소재와 어렵지 않은 스토리 라인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게 기획 포인트다. 단순하고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해서 주제에 있어서는 얕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서현은 엄마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모성을 지우고 관계를 끊는 선택을 한다. 감정적으로만 보면 감동적이고 쉽게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것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생각할 거리가 많은 주제라고 생각했다. 어렵지 않지만 곱씹다 보면 생각할 거리가 많은 영화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정이’를 기획했다.”

-새로운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세트 제작에도 심혈을 기울였을 것 같은데.  
“‘정이’를 하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 중 하나는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엄두를 못 냈을 거라는 거다. 세트가 엉망진창으로 나오면 어떡하지 걱정했을 텐데 이미 미술팀이나 세트팀이 앞서 SF를 시도한 작품들을 통해 어느 정도 노하우가 구축된 상태였다. 하다못해 목공 하는 분들도 익숙해진 상태라 ‘로봇 세트를 하려면 이렇게 잘라야 해’라고 하시더라. 몇 편만으로도 노하우가 쌓인 상태였다. 앞으로 한국영화가 더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기술, 스태프들의 노하우 축적력이 어마 무시하다. 몇 번의 트라이만으로도 높은 수준을 축적하는 상황이다. 더 기대되는 면이 있다.”

매 작품 도전을 멈추지 않는 연상호 감독. / 넷플릭스
매 작품 도전을 멈추지 않는 연상호 감독. / 넷플릭스

-각기 다른 방식이지만 작품을 통해 모성, 부성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왔다.   
“모성이나 부성, 가족애 이런 것들은 어떤 앵글로 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다. ‘정이’에서 그려진 모성을 끊어야만 그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선택권이 딸에게 있다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내가 그린 부성, 모성과 다른 앵글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곧 SF적인 질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나의 부모를 위해서 자식이 관계를 끊을 수 있는 기회가 존재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현실에서 힘든 것들을 상상해 볼 수 있는 게 SF 장르의 매력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감독이 하고 싶은 이야기와 대중이 감독에게 기대하는 것이 항상 일치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이 지점에 대한 고민도 하나.
“당연히 고민한다. 대중의 취향과 완벽하게 맞는 작품을 매번 하고 싶다는 생각은 거의 꿈처럼 갖고 있고, 예술가들이 가장 갖고 싶어 하는 재능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내게는 그런 재능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지 꽤 됐다. 도달하지 못하는 재능을 꿈꾸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을 거다. 만약 내가 갖고 있지 않은 재능을 여전히 꿈꾸고 있다면 영화를 만드는 게 즐겁지 않았을 거다. 어느 정도 인정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놓고 나서는 영화를 만드는 게 재밌어졌다. ‘부산행’ 이후 내가 뭐든 만들면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 재능이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런데 그 생각은 2년을 못가서 깨졌다. 하하. 되게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정이’ 후속편 계획은 없나.  
“나는 영화를 만들면 항상 뒤를 상상한다. 이야기를 상상하는 건 자유잖나. 하하. 이 영화를 만들 의미가 있는가, 그것을 판단하는 시간은 꽤 오래 걸릴 것 같다. 아니면 영원하게 엔딩을 내는 게 맞는가 생각을 하고 있다. 계획은 아직 없다. 정이의 행운을 빌어주는 게 영화를 통해 하고 싶었던 가장 큰 이야기였다. 지금의 엔딩 보다 더한 메시지, 축복 같은 것들을 표현할 자신이 있다면 작업할 거다. 하지만 지금은 행운을 빌어주는 것 이상의 축복이 존재할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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