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권정두 기자  지난달 말, 기업들의 반기보고서를 하나하나 살펴보던 기자는 모 기업의 임원 현황에서 한 이름을 발견하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주인공은 세종공업, 그리고 박정규 부회장이었다.

이들의 이름이 기자의 자세를 고쳐 잡게 만든 건 기사를 작성했던 옛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기자는 과거 박정규 세종공업 부회장(당시엔 총괄사장)이 배임·황령 및 도박 혐의로 구속됐다는 기사를 작성한 바 있다. 또한 해당 사건으로 그가 세종공업을 떠나고, 이후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다.

불과 2~3년 전의 그리 오래된 기억이 아니었기에 박정규 부회장의 재등장은 뜻밖이었다. 바로 직전의 보고서들을 살펴보니 그의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한 건 올해 1분기 보고서부터였다. 당연히 그의 재판이 최종적으로 어떻게 마무리돼 언제 자유의 몸이 된 것인지, 취업제한 문제는 없는지, 그리고 그의 복귀가 도의적 측면에서 문제가 되진 않는지 많은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해당 사안에 대한 취재에 착수한 기자는 이내 또 뜻밖의 상황을 맞았다. 본지에 ‘고충처리’ 요청이 접수된 사실을 전달받은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박정규 부회장이었다. 그는 이달 초 본지가 과거 보도한 자신의 기사를 제시하며 삭제를 요청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법의 심판을 받았고 징역 2년 6개월을 받고 온 후 세종공업 자리를 내놓았다. 현재 전 무직상태임으로 세종공업과는 관련이 없다. 석방 후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과거의 죄를 씻어내려 한다. 과거의 이력으로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사생활 및 개인정보 침해 피해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회사 차원에서 연락을 취해 본 결과, 박정규 부회장이 직접 남긴 요청은 아니었다. 그의 의뢰를 받은, 소위 ‘사이버 장의사’ 혹은 ‘디지털 장의사’라 일컬어지는 업체가 남긴 요청이었다. 

이처럼 불과 며칠 사이에 기자에게 벌어진 일련의 일들은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일단 앞뒤가 맞지 않았다. 세종공업의 분기보고서와 반기보고서엔 분명히 박정규란 이름이 존재했다. 직위는 부회장이고 미등기·상근 임원이었으며 담당업무는 업무총괄로 똑똑히 명시돼있었다. 동명이인도 아니었다. 그런데 과거 기사 삭제를 요청하면서는 자신이 세종공업을 떠났고, 무직상태이며,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한다고 했다.

사생활 침해 피해를 입고 있다는 것 역시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는 연매출이 1조원대에 달하는 어엿한 상장 중견기업의 오너일가 2세이자 핵심 경영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185억원을 배임·횡령했다. 또 이 중 상당한 금액을 도박에 썼다. 국내와 해외 카지노는 물론, 심지어 ‘전화베팅’까지 가리지 않은 그의 상습도박 범행규모는 146억원에 달했다. 결코 일개 직원의 일탈 수준이 아니었다. 무거운 책임이 따르는 엄연한 ‘공인’의 중대한 범죄였다. 

이번 기회에 낱낱이 확인한 박정규 부회장의 범행 내용 중 기자를 가장 분개하게 만든 것은 배임이었다. 그는 자신이 이끄는 회사가, 자신이 보유 중이던 주식을, 시가보다 비싸게 사도록 했다. 이를 통해 본인이 얻은 이익은 회사에겐 고스란히 손해가 됐다. 그리고 이 돈을 도박에 썼다. 박정규 부회장이 법과 질서, 회사와 주식시장을 우습게 여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큰 기대를 하진 않았지만, 취재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제대로 된 소통의 창구가 없다보니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것은 물론 반론권 제공 차원의 입장 및 해명을 듣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나마 어렵사리 받아낸 답변은 박정규 부회장이 세종공업을 떠났다거나 무직상태라는 내용이 업체의 착오였다는 것뿐이었다. 

아쉬움만큼이나 여전히 커다란 의문이 남는다. 박정규 부회장은 왜 자신의 과거를 지우려 할까. 그는 분명 수사 및 재판과정에서 자신의 혐의를 인정하고 반성했다. 하지만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를 대며 과거 기사 삭제를 요청하는 모습은 진정한 반성과 거리가 멀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한다. 이는 민족이란 집단에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다. 일개 개인도 다르지 않다. 설사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그것을 반성의 거울로 새겨야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다. 그저 지워 없애버린다면 미래 또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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