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이 부적절한 요구와 감정만 분출하는 창구가 됐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청와대 홈페이지>

[시사위크=은진 기자]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이 부적절한 요구와 감정만 분출하는 창구가 됐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청와대는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는 원칙 아래 20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은 청원에 한해 공식답변을 내놓는 국민청원제도를 5개월 째 운영해오고 있다. 하지만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한 정형식 판사 파면, 평창 동계올림픽 경기에서 논란을 빚은 특정 선수들의 국가대표 자격을 박탈해달라는 요구 등 청와대가 관여하기 곤란한 청원이 대부분이어서 국민청원제도의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비판이다.

22일 현재 청와대 ‘국민청원 및 제안’ 게시판에서 청와대의 공식답변을 기다리고 있는 청원은 총 8건이다. 그중 가장 많은 동의를 얻은 것은 ‘김보름, 박지우 선수의 자격박탈과 적폐 빙상연맹의 엄중 처벌’ 청원이다. 청원인은 “이렇게 인성이 결여된 자들이 한 국가의 올림픽 대표 선수라는 것은 명백한 국가 망신”이라며 “김보름과 박지우의 국대(국가대표) 자격 박탈 그리고 올림픽 등 국제 대회 출전 정지를 청원한다”고 적었다. 이 청원은 현재 56만7,266명의 동의를 얻었다.

하지만 해당 사안은 청와대가 관여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고민정 청와대 부대변인은 김보름·박지우 선수 관련 청원에 대해 청와대 라이브 방송에서 “‘청원 게시판이 분노의 배출창고가 되는 것이 아닌가’ ‘인민재판소가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청와대가 입법기관이 아니기에 모든 것을 해결해드릴 순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재용 부회장의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한 정형식 판사의 파면 청원에 대해서는 해당 분야와 관계없는 정혜승 청와대 뉴미디어비서관이 답변자로 나섰다. 정 비서관은 “헌법 제 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하고 있다. 청와대가 (판사를 파면할) 권한은 없다”고 원론적 답변을 내놨다.

청와대는 답변할 사안이 아닌 내용의 청원이 잇따르고 있는 데 대한 난감함을 표출하고 있다.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은 전날 국회 운영위원회 업무보고에서 “(답변 기준인) 국민청원 추천 20만 건 이상이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며 “고충을 말씀드리자면, 답변하기 부적절한 성격의 문제가 많이 올라온다”고 말했다. “일단 20만 명을 넘으면 답변하겠다고 한 것을 어떻게 할지…”라고 난색을 표하기도 했다.

청와대가 관여할 수 없는 부분까지 국민청원 요청이 들어오면서 청와대의 입장도 곤혹스러워지는 모습이다. 청와대는 현재 중복 청원 동의를 막기 위해 일부 소셜 로그인 서비스를 제한하고 있다.

이렇다보니 정치권에선 국민청원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무소속 이용호 의원은 이날 논평을 통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이 ‘인민재판장’화 되고 있다. 들어주면 대통령 탄핵감인 요구들이 쇄도하고 있다”며 “적절치 못한 요구와 답변으로 삼권분립을 위협하고 국민신문고와 중복행정, 국민권익위 패싱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헌법적 가치와 제도가 온라인 여론에 의해 무력화되고 있다는 우려가 높다”고 비판했다.

이 의원은 “국민청원 게시판에 부분 실명제를 도입하거나 아니면 게시판을 폐쇄할 것을 촉구한다”며 “홈페이지 실명인증 및 회원가입을 한 후 이용하되 게시물은 익명처리하고 청와대 답변 시 작성자 아이디 일부를 공개하는 방식이라면 무분별한 청원이나 중복추천 문제는 상당 부분 해소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일단 청와대는 문재인 정부가 대표적인 국정철학으로 ‘소통’을 내세우고 있는 만큼 국민청원제도를 현행대로 유지하겠다는 방침이다. 고 부대변인은 청와대 라이브 방송에서 “국민들에게 소통의 창구를 열어놓는 것은 큰 의미다. 소통은 쉽지 않지만 꼭 가야할 길임은 분명하다”고 밝혔다. 김선 청와대 행정관도 이 자리에서 “청원은 국민들의 의사 표시라서 그것이 항상 차분하게 개진되기만을 바랄 수는 없다”며 “(이번 김보름·박지우 청원이) 국민들의 분노의 표시일 수 있는데, 그것조차 청와대가 받아들이고 경청하면서 사회를 바꾸어나가는 목소리로 활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밝혔다.

대통령에게 직접 청원하는 국민청원 게시판이 호응을 얻고 있는 데에는 국민의 대표기관으로 불리는 국회가 제기능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민원이나 입법사안의 경우 국민권익위원회의 고충처리 서비스 제도가 운영되고 있고 해당 지역구 국회의원을 통한 민원제기도 가능한데, 공공기관이나 국회에 대한 신뢰도가 낮은 상황에서 이런 절차는 무용지물에 가깝다는 것이다.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국회의원의 급여를 최저시급으로 책정해달라’는 내용의 청원이 20만 명 넘는 동의를 얻어 청와대의 공식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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