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범 전 국방홍보원장.

피의자 신분의 이명박 전 대통령(MB)은 검찰이 요구한 시간에 정확히 출두했다. 3월 14일 오전 9시 25분, 논현동 자택을 출발한지 10분 만에 서초동 중앙지검에 도착, 포토라인에 섰다. 양복 상의 안쪽 호주머니에서 백지 한 장을 꺼내 곧바로 읽어 내려갔다. 조사에 앞 선 자신의 입장을 발표한 것이었다.

모두 여섯 문장, 223자(字)의 이 짧은 글을 낭독하는 데는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혹시나 알맹이 있는 메시지라도?’ 하고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실망스런 순간이었다. 한 여기자가 MB의 혐의사실에 관해 물었으나 질문과 상관없는 엉뚱한 말만 던지고는 청사 계단을 올라갔다.

입장문 세 곳에 ‘죄송하고 미안하다’는 단어를 넣긴 했으나 진정성 있게 들리진 않았다. 자신의 오랜 측근들이 줄줄이 소환돼 진실을 밝혔지만 혐의 사실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지난 1월 성명서 발표 때 사용했던 ‘정치보복’ 이니 ‘보수궤멸’이니 하는 말은 올리지 않았다. 그러나 문장 곳곳에 배어있는 현 정부 검찰에 대한 불만과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는 못했다.

“오늘 착잡한 심정으로 이 자리에 섰다”고 말문을 연 것부터가 그랬다. 그가 받고 있는 혐의만도 △뇌물수수 △횡령·배임 △직권남용 △조세포탈 △대통령기록물관리법위반 등 20가지나 된다. 그런데 첫 마디부터가 ‘착잡하다’니 도대체 피의자가 온 국민이 보는 앞에서 할 소리인가? 바꿔 말하자면 ‘이렇게 검찰에 출두하는 상황이 기가 막히고 억울하다’는 얘기 아니겠는가.

진정으로 착잡한 사람은 누구인가? 서울시장과 대통령을 지낸 공인중의 공인이 불법으로 자기 개인 재산을 불려온 혐의로 검찰에 출두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심정이야말로 착잡하기 그지없다. 지금 MB가 받고 있는 혐의는 순전히 개인적인 금전비리에 해당한다. 여기에는 그의 재임 중 최대 비리로 알려진 이른바 ‘사자방’(4대강 사업·자원외교·방위산업) 관련 혐의 내용은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은 대기업으로부터 엄청난 자금을 뜯어내 착복했을지언정 MB처럼 장기간에 걸쳐 치밀하고 지능적인 수법으로 자신과 그 가족의 사유재산 증식에 몰두하지는 않았다. MB야말로 기네스북에 오를만한 인물로, 직위를 이용한 재산증식 올림픽이 있다면 단연 금메달감이리라.  

입장문에서 MB는 이어 특유의 안보논리를 갖다 붙였다. “무엇보다도 민생경제가 어렵고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환경이 매우 엄중한 때…”라며, ‘자신의 일로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하다’고 말했다. ‘경제와 안보논리’는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는 수법이다. 말하자면 MB도 보수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들은 정치인이건 관료건 군인이건 툭하면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환경~’ 운운하면서 자신들이 마치 우리나라 안보를 독점하고 있는 양 목청을 높인다. 그러나 그들이 언제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환경’을 평화지대로 바꿔보려고 노력해 본 적이 있기나 한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분단을 고착화하고 남북간 긴장과 대립을 더욱 첨예화하는 데 몰두해 온 사람들 아닌가. 그들에게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환경’이라는 말은 입에 붙은 익숙한 관용구가 돼 버렸다.

MB는 자신이 전직 대통령으로서 할 말도 많지만 가급적 말을 아끼려 다짐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 말 속엔 ‘내가 대통령 재임 중 지득한 정보도 많아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국가를 위해 내가 자제하려고 한다’는 속내를 깔고 있다. ‘내가 다 까발리면 너희들도 다칠 테니 내가 참는다는 것’ 아니겠는가. ‘검찰이 내게 수많은 혐의를 두고 있지만 나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도 내비치고 있다.
 
박근혜의 뒤를 이을 것으로 예상되는 이 시점에서 MB는 말을 아낄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씌워진 많은 혐의사실에 대해 진실을 털어놓아야 한다. 감추고 속인다고 그것이 말끔히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을 것이다. 그런 다음 차분히 법의 심판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는 후반에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다만 바라건대 역사에서 이번 일로 마지막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 말은 박정희가 ‘5.16을 일으킨 불행한 군인은 내가 마지막이 되길 바란다’는 식으로 한 발언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고약한 것은 무려 20가지가 넘는 범죄 혐의로 검찰에 출두한 MB가 ‘역사’를 입에 올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MB는 성공한 샐러리맨의 신화로 30대에 사장, 40대에 회장에 오른 기업인이었다. 정치에도 입문, 두 번의 국회의원을 지냈고 민선 서울시장 재임 중엔 청계천 복원공사에 성공한 뒤 일약 대선후보로 선출돼 17대 대통령에 당선된 바 있다. 그런 그가 언제 ‘역사’라는 주제로 고민해 본 적이 있기나 했을까? 그런데도 MB는 자신을 자랑스런 역사의 반열에 올려놓고 싶은 모양이다. ‘지금 문재인의 검찰이 나를 정치적으로 탄압하고 있지만 나는 전직 대통령이자 역사적인 인물’이라는 사실을 애써 과시하고 싶은 건 아니었을까. 

박정희 대통령이 통치하던 1967년 1월, 신동엽(1930~1969) 시인은 분단된 이 땅의 모든 거짓된 것들은 모두 물러나고 참된 것만 남아 있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껍데기는 가라”고 외쳤다. 전직 대통령 가운데 한 사람은 이미 감옥에 가 있고, 또 한 사람은 감옥행을 준비해야 하는 지금의 대한민국은 분명 대전환기적 상황에 놓여 있다. 

시인의 말처럼 우리는 이제 그동안 익숙해 왔던 것들과 과감하게 결별해야 하는 결단의 시기를 맞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촛불혁명 이전과 이후는 확연히 달라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이명박을 끝으로 우리 사회에 잔존해 있는 ‘껍데기’들은 과감히 털어내야 하고, 그래야 대한민국이 21세기 새로운 시대로 진입할 수 있다.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오직 목표달성에만 매달려 온 이 땅의 보수라는 사람들은 선거 때는 돈으로 표를 사느라 ‘차떼기 정당’의 오명을 뒤집어 써야 했고, 최전방 적군에게 ‘남쪽을 향해 총질 좀 해 달라’고 요청하는 이적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이명박의 국정원(원세훈 원장)은 박근혜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대규모 민간인 댓글부대를 동원, 운영하기도 했다.

14일 검찰 포토라인에서 MB는 말했다. “바라건데 이번 일로 역사에서 마지막이 되었으면 한다”고. 그렇다. 그런 ‘껍데기’들은 더 이상 우리 역사에서 사라져 줬으면 좋겠다. 제발 바라건대 껍데기는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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