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겸 칼럼니스트

주변의 스승과 제자를 보면 가끔 느껴지는 게 있다. 조언을 구하지 않는 자! 배움을 청하지 않는 자에게 굳이 나서서 말을 할 필요가 없는 듯하다. 스스로 지행합일 언행일치가 중요한데 그것도 못하면서 뭐 잘났다고 도움을 요청안하는데도 나서냐는 말이다. 겸손하지 못한 일로 시내 중심가 길가에서 도를 떠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꼭 도움을 필요로 할 때까지는 함부로 인연관계에 얽히면 안된다.

조언이나 배움 등 도움을 청한 이에게는 이야기가 다르다. 다만, 청하면서도 부연설명이 많거나 말을 하는데 도중에 끊으면서 변명이 많은 이들은 좀 다르다. 진정한 성직자나 멘토라면 이들에게는 기분을 맞추고 돈을 뜯어내기 위한 ‘손님’ 대접이나 마케팅을 하지 말아야 한다. 정말 필요한 말만 비록 '돌직구'라도 던져야 한다. 그게 황벽선사가 젊었을 때 임제스님을 몸둥이 찜질한 이유이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펴며 진심으로 제자 사람을 대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어줍잖게 한 소식한듯, 잘난척하며 말을 많이 하는 이들은 '겸손'을 모르기에 진정으로 조언을 구하거나 당연히 제자도 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러면서 참고나 하려고 ‘수행 쇼핑’을 거듭하며 스스로의 외로움을 더 깊은 심연으로 숨길 따름이다. 이 스승에게 묻고 저 스님에게 묻고 그 점쟁이에게 묻는 가운데 하나 더 물은 것 뿐이다. 그러기에 하등에 대답할 가치가 없다. 하지만 하더라도 안받아들이니 줘도 못먹는 격이다.

그 못된 마음을 고치는데 죽비찜질 만큼 좋은 게 없다. 그러나 민주 법치 국가에서 그게 불가능하니 많은 이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혼'을 쏙 빼주는 것도 대치할 수 있는 방법이 된다. 물론 욕을 하거나 언성을 높여서는 안되며, 동석한 모두가 납득하도록 바른 말로 '돌직구'를 던지면 된다. 그러면 다른 이들에게는 '타산지석'으로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부수적인 효과도 적지 않다. 타산지석처럼 좋은 교육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뉴칼레도니아 노깡위 무인도 전경 <에어칼린 제공>

돌직구를 맞은 '쇼핑'을 하는 이들 가운데 80-90%는 바로 화를 내며 떠나간다. 비위를 맞춰주지 않는 스스로가 보기에는 같잖은 '스승'이나 '선생' 또는 '멘토'와 같이 있고 싶지 않을 따름이다. 하지만 조언을 구하거나 가르침을 청한 순간에 상대는 바로 선생님이나 멘토가 된다. 스스로가 부여한 것이기에 자승자박에 빠진 셈이다.

가끔 의외로 겸손하게 받아들이거나 다시 찾아온 이들 가운데는 참 많은 발전을 이루기도 한다고 한다. 사주는 물론 운명도 바뀌니 자식이나 후대의 운명도 바뀐다. 다만 자신에게 영향을 받는 이들은 바뀌지만 멀리 떨어져 사는 가족이나 이미 돌아가신 가족은 당장은 별개의 문제인듯하다.

지금의 인품이나 언행이 바로 전생의 업이라고 할 수 있다. 사주는 그런 의미를 가진다. 관상도 그렇다. 꼴값하고 사는 것이다. 그런데도 나쁜 것만 피하려고 도망가는 것은 마장이 낀 것일 따름이다. 가르침을 소중하게 받아서 고쳐서 심성이 바뀌면 관상도 바뀐다. 바뀐 관상이 사주보다 큰 영향을 끼친다. 그렇게 인품이나 언행을 지금 당장 여기서 바로 고치면 운영의 반을 차지하는 '사주'까지도 바뀐다.

인과응보란 그런 의미를 갖나보다. 불교를 넘은 인생의 참 된 의미가 거기에 있는데 참으로 고치는 데는 힘이 든다. 그런 인연을 만나기 어려워서 시절인연이라고 하는데 그런 소중한 말은 어디서 배워서 의미도 모르고 실천도 못하면서도 말만 잘한다. 스스로 안다고 떠드니 무르 익지 않음이며 자존감이 아닌 자존심만 남은 어쩌면 아픈 상처로 인한 '우울증'의 발현일 수도 있다.

멘토와 멘티사이에는 하기 싫다고 피하거나 도망하면 안된다. 애초에 관계를 맺지 않으면 모를까 맺고 나서는 믿으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안 그렇다면, 왜 하고 싶지 않은지 그 마음을 보면 관조하면 될 따름이다. 전생이나 이승에서 크게 좋은 선한 공덕을 쌓은 것도 아니면서 왜 좋은 것만 받으려는지 그 욕심을 보는 것이다. 그렇게 지금 선 자리를 보는 것이 수행에 있어서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다. 이걸 피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속이는 것으로 불기지심이 이것이다.

뉴칼레도니아 아데데 등대 내부(에어칼린 제공)

언제나 소중하게 평생 한 번 만난 것처럼 최선을 다해 손님을 넘어 수천년의 '스승과 제자'로 대하는 것이 '일기일회'의 의미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조언을 구하는 이에게 전생의 나를 가르쳐준 스승처럼 대하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진심을 다해 던지는 '돌직구'를 스스로의 잘못은 고치는 '자경책'으로 삼으라는 말도 된다.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은 나의 자화상이며 나아가 나를 비추는 업경이기도 하다. 그렇게 전생의 업을 하나씩 풀어가는듯이 '돌직구'를 던지며 진심을 다하면 될 따름이다.

언제나 꼭 깨어서 봐야 할 것은 "내가 왜 그런 질문을 하고 싶은지" 등등 모든 '동사'의 이유. 즉 모든 언행의 근본 욕심을 찾아야 한다. 고집멸도 사성제의 깨침에서 알 수 있듯이, 욕심의 근원을 찾아야 소멸시킬 수 있는 방법도 찾을 수 있다. 병명을 모르고 아무런 약을 쓸 수 없는 것과 같다. 고통의 근원을 알아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지금 받는 고통이 바로 전생과 이승의 인과응보의 결과이며 그런 돌고 도는 인연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는 것이 수행의 목적이다. 바로 여기서 받아들이며 스스로의 행을 참회하고 그 업장의 끈을 자르는데 있다. 도망이나 받아들이지 않음은 마장일 뿐이다. 도망가면 이자까지 쳐서 다시 고통을 당해야 함은 바다에서 이리 저리 피하다가 삼각파도나 해일을 만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어차피 맞아야 할 매는 먼저 맞으며 맞은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고 참회하며 스스로가 수행의 자량으로 삼아야 할 따름이다.

좋은 스승이 없어서 이 생에서 못만나는 것이 아니다. 돈 자랑 마음공부 자랑을 하면서 스스로 '줘도 못먹는' 인간이 된 것이 문제가 된다. 스스로가 간장 종기처럼 작아지기만 했는데도 스스로의 됨됨이 작은 것. 스스로의 안목이나 그릇의 작음을 모르고서 남탓만 하는 이가 바로 자기자신임을 먼저 깨쳐야 한다. 남탓이란 바로 스스로의 인연과 업장을 부정하는 일은 해서는 안될 가장 경계해야 할임도 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함부로 가르쳐도 안되고 배움을 청해도 안되며 만약 멘토와 멘티라는 인연을 맺었다면 사력을 다해 정성껏 서로 거울을 보듯이 스스로를 닦아야 하나 보다. 가끔 불교의 석가모니 부처님이 말씀하신 윤회의 법이 참으로 무겁고도 무서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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