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10 22:06 (월)
[김재필 '에세이'] H에게- 즐거운 삷과 죽음
[김재필 '에세이'] H에게- 즐거운 삷과 죽음
  • 시사위크
  • 승인 2018.11.27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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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필자: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지난주에는 강원도 고성에 있는 금강산 건봉사에 다녀왔네. 금강산 남쪽 초입에 있는 건봉사는 한 때 3000여 칸 규모의 대가람으로 속초 근방에서는 제일 큰 절이었지. 설악산 에 있는 백담사, 신흥사, 화암사, 양양 바닷가에 있는 낙산사가 모두 건봉사의 말사일 정도로 그 위세가 대단했어. 하지만 1878년 발생한 큰 불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소실됐고, 한국전쟁 때는 근처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서 완전한 폐허가 되고 말았지. 지금은 신흥사의 말사인 건봉사에서 볼 수 있는 적멸보궁, 대웅전, 대석단, 명부전 등은 다 전쟁 후에 복원된 건축물들이라네.

건봉사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스승인 휴정 서산대사의 명을 받고 승병 700 여명을 훈련시켰던 곳이기도 하네. 건봉사 입구에 있는 유정 사명대사 동상과 그 뒷산에 있는 수많은 부도들을 보니 서산대사가 입적하기 전에 불렀다는 게송이 생각나더군.

삶은 한 조각 뜬구름 일어남이요(生也一片浮雲起 생야일편부운기)죽음은 한 조각 뜬구름 스러짐이니(死也一片浮雲滅 사야일편부운멸)뜬구름이 본래 실체가 없듯(浮雲自體本無實 부운자체본무실) 삶과 죽음도 실체 없기는 마찬가지라(生死去來亦如然 생사거래역여연)

나이가 들면서 죽음을 생각하는 횟수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네. 여행 중에 절을 찾는 이유 중 하나도 아마 그런 변화와 관련이 있을 걸세. 절은 어디에 있든 주중에 가면 한적해. 그래서 절간 한 구석에 앉아 세속적인 욕구 충족밖에 몰랐던 지난 삶을 반성하고, 내가 누구인지도 다시 찾아보고, 또 앞으로 남은 세월을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 말년이 될 수 있을지를 천천히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좋지. 삶과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하고 돌아온다고나 할까

이 시대의 마지막 무애도인이라고 일컫는 무산 조오현 스님의 <적멸을 위하여>라는 시일세. 절에 가면 자주 떠올리는 짧은 선시야.

삶의 즐거움을 모르는 놈이/ 죽음의 즐거움을 알겠느냐// 어차피 한 마리/ 기는 벌레가 아니더냐// 이다음 숲에서 사는/ 새의 먹이로 가야겠다

  적멸은 불교 용어로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 생과 사의 괴로움과 두려움마저도 끊어 버린 상태일세. 해탈이나 열반의 상태지. 해탈은 속세의 모든 욕망이나 집착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상태이고, 열반 즉 니르바나는 속세의 모든 욕망과 고뇌를 끊고 해탈한 최고의 경지를 이르는 말이네. 불교 승려들이면 누구나 추구하는 고행의 목표가 해탈과 열반이야. 적멸위락(寂滅爲樂)이라는 사자성어도 있는데,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열반의 경지를 즐기는 것을 말하지.

나는 저 시를 읊을 때마다 자문하네. 정말 삶의 즐거움을 알면 죽음의 즐거움도 알까? 물론 난 그럴 수 있다고 믿네. 즐겁게 산다는 게 뭔가? 세속적인 욕망이나 집착을 버리고 작은 것에 만족하면서 사는 걸세. 역설적이지만, 모든 게 덧없다는 걸 알면 유한한 삶이 즐거울 수밖에 없네. 나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을 쓸데없는 번뇌로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 죽음도 생명 있는 것들이 다 거쳐야 할 자연스러운 과정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마음 편해. 나만 죽는 게 아니잖아. 생로병사가 모든 인간이 겪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면 굳이 생과 사를 분별할 필요도 없지. 내가 좋아하는 장자는 아내의 주검 앞에서 노래하고 춤을 췄네. 삶과 죽음이 서로 다른 게 아니고 하나라고 생각했으니까.

불교에서는 수행자들을 운수납자(雲水衲子)라고 부르네. 남루한 누더기 옷을 입고 구름 따라 물 따라 돌아다니면서 수행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야. 그들은 모든 게 덧없고, 실체가 없고, 삶이 고통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특정한 무엇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들일세. 젊었을 때부터 역마살이 낀 내가 이런 운수납자처럼 살아온 것 같네. 오늘 다시 내가 좋아하는 신경림 시인의 <떠도는 자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바람 따라 구름 따라 어디인가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으니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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