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의 전화가 지난해 10월 2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국가의 가정폭력 대응 강력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뉴시스
한국여성의 전화가 지난해 10월 2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국가의 가정폭력 대응 강력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뉴시스

시사위크=은진 기자  베트남 이주 여성인 아내를 폭행한 남편의 가정폭력 사건이 국민적 공분을 사면서 정치권에서는 가정폭력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하지만 가정폭력 사건이 사회적으로 논란이 돼왔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논란이 있을 때마다 국회에서는 가정폭력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이 쏟아져 나왔지만, 입법은 여전히 지지부진하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8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우리 사회가 여전히 뿌리 뽑지 못한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폭력과 억압의 실상이었다. 엄마를 외치는 두 살 배기 아이를 옆에 두고 야만적인 폭력이 휘둘러졌다는 점에서 형언할 수 없는 절망감도 느꼈다. 폭력으로부터 국민을 지키지 못한다면 국가는 더 이상 그들에게 국가가 아니다. 정치권은 이제 가정폭력에 대한 어떤 관용도 허락해서는 안 된다. 굳게 잠긴 현관문 안에서 벌어지는 공포의 폭력을 더 이상 가정사로 덮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판사 출신인 나 원내대표는 자신이 맡았던 한 가정폭력 사건을 언급하며 “정말 무참하게 매 맞고 상습적으로 매 맞으면서도 ‘우리 남편이 일하지 못하면 먹고살기 어렵다’면서 풀어달라는 피해자들의 처벌 불응 의사를 여러 번 보았다. 그리고 1년도 안 돼 (가정폭력이) 또 반복돼서 다시 법원에 나타나기도 했다”며 “현행 반의사불벌죄를 폐지하는 것을 검토해보겠다”고 했다. 현재 가정폭력 범죄는 ‘반의사불벌죄’가 적용돼 피해자가 가해자의 처벌을 원하지 않을 경우 처벌할 수 없다. 대부분의 가정폭력이 부모-자식 또는 부부라는 특수한 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만큼 처벌 의지를 피해자의 의사에 맡기는 것 자체가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이 계속돼왔다.

가정폭력 범죄에 대해 반의사불벌죄를 폐지하거나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의 법안은 이미 국회에 상당수 발의돼있다. 현재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돼있는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가정폭력특례법) 개정안은 총 30건에 달한다. ‘가정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가정폭력방지법)도 여성가족위원회에 8건의 개정안이 접수돼있다.

가정폭력 가정을 ‘재발우려 가정’으로 지정해 정기 점검하도록 한 권미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가정폭력방지법 개정안, 영장 없이 피의자 체포를 할 수 있도록 한 송석준 한국당 의원의 가정폭력특례법 개정안, 가정폭력 범죄에 대해 반의사불벌죄 적용을 폐지하는 내용의 가정폭력특례법 개정안은 채이배 바른미래당 의원과 고용진 민주당 의원이 발의했다.

◇ “가정폭력 얼마나 더 반복돼야 하나”

지난해 10월 서울 강서구의 한 아파트 주차장에서 이혼한 아내를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한 남성의 ‘강서구 주차장 살인사건’이 발생한 뒤 정부는 ‘가정폭력 방지대책’을 발표한 바 있다. 가정폭력 가해자에 대한 경찰의 초동 조치를 강화하고 가해자의 자녀 면접교섭권 제한, 접근금지명령 등 임시조치 위반 시 징역형 또는 벌금형으로 강화하는 등의 내용이 골자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항이 국회 입법 조치가 필요한 내용이어서 현재 실행되고 있는 게 거의 없는 수준이다.

‘강서구 주차장 살인사건’ 이후 여가위 소속 일부 국회의원들은 “가정폭력은 폭력이 정당화되거나 축소·은폐·지속되기 쉽기 때문에 가정폭력처벌법 개정을 통해 개인의 존엄과 인권을 침해하는 범죄임을 분명하게 확립해야 한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당시 여가위 국정감사에서는 강서구 사건의 피해자 유족이 증인으로 출석해 가정폭력과 관련된 법 개정을 촉구했었다.

하지만 반복된 국회 파행으로 상임위 법안 심사가 멈춰서면서 가정폭력 관련 법안 심사도 제자리만 맴돌고 있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가정폭력 신고 건수는 지난해에만 24만 8,660건이 접수됐고 이중 가해자가 검거된 건수는 3만 422건이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의 통계에 따르면 가정폭력 행위자 324명 중 79%인 256명이 남성이었다. 특히 이주여성 등 취약한 위치에 놓여있는 여성에 대한 가정폭력이 빈번해지고 있다는 점에서 하루 속히 국회가 법안 심사에 돌입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의 강혜숙 대표는 이날 KBS라디오 인터뷰에서 “결혼 이주 여성들은 외국인 등록증을 발급받을 때부터 한국인 배우자의 신원 보증이 유효해야만 체류할 수 있다. 이후에 체류 연장이나 한국 국적을 취득하려고 신청할 때에도 남편의 신원 보증이 유효한가를 보고 그 외의 서류도 남편의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주 여성이 가정폭력 피해에 노출돼있다고 해도 체류 연장을 위해 쉽게 상담소를 찾거나, 경찰에 신고하기 어려운 조건”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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