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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필 박사의 세상사는 이야기] H에게 ⑨
[김재필 박사의 세상사는 이야기] H에게 ⑨
  • 시사위크
  • 승인 2014.02.03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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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김재필(미 델라웨이대학 사회학 박사)
설날 아침이네. 태어나서 60번째 맞이하는 설이라 그런지 여느 설날보다 감회가 새롭구먼. 공자는 논어 <위정편>에서 예순 살부터는 어떤 일을 들으면 곧 이해가 된다면서 60살을 이순(耳順)이라고 말했네. 생각하는 게 원만하고,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걸 순리대로 듣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귀가 순해지는 나이라는 뜻이지. 내가 태어난 갑오년을 다시 시작하는 설날이니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시를 읽으면서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반성도 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다가 가고 싶은지 이야기하고 싶네.  

먼저 박노해 시인의 <삶의 나이>를 읽어 보세. “어느 가을 아침 아잔 소리 울릴 때 / 악세히르 마을로 들어가는 묘지 앞에 / 한 나그네가 서 있었다 / 묘비에는 3·5·8 … 숫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 아마도 이 마을에 돌림병이나 큰 재난이 있어 / 어린아이들이 떼죽음을 당했구나 싶어 / 나그네는 급히 발길을 돌리려 했다 / 그때 마을 모스크에서 기도를 마친 한 노인이 / 천천히 걸어 나오며 말했다 // 우리 마을에서는 묘비에 나이를 새기지 않는다오 /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오 / 사는 동안 진정으로 의미 있고 사랑을 하고 / 오늘 내가 정말 살았구나 하는 / 잊지 못할 삶의 경험이 있을 때마다 / 사람들은 자기 집 문기둥에 금을 하나씩 긋는다오 / 그가 이 지상을 떠날 때 문기둥의 금을 세어 / 이렇게 묘비에 새겨준다오 / 여기 묘비의 숫자가 참삶의 나이라오”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시일세. 나는 우리 집 문기둥에 몇 개의 금을 그을 수 있을까? 나의 묘비에 새겨질 “참삶의 나이” 숫자는 얼마일까? 이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진정으로 의미 있는 삶을 산 날은 며칠이나 될까?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에 “오늘 내가 정말 살았구나”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날이 몇 번이나 있었는지…. 부끄럽구먼.

그래서 근래에는 아직 어린 손자 손녀들에게 부끄러운 할아버지로 기억되지 않게 헛되이 살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네. 물론 현재 내가 풍성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네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네. 하지만 이 세상 모든 것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면서 단순하고 간소하게 살려고 노력 중이라는 건 인정해주길 바라네. 함께 동시대를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도 관심을 갖고 그들에게 내가 어떤 식으로든 쓸모 있는 존재가 되려고도 애쓰고 있네. 현재 내 “참삶의 나이”가 몇이든 상관없이, 앞으로는 나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그냥 헛되이 보내지는 않을 것이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함석현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나는군. 나보다는 후손들의 미래를 먼저 걱정하는 ‘생각하는 노인’으로 늙고 싶네. 무엇보다도, ‘참된 삶’이 무엇인지를 항상 고민하면서 사는 노년을 살고 싶고.

“눈이 내린다 기차 타고 / 태백에 가야겠다 / 배낭 둘러메고 나서는데 / 등 뒤에서 아내가 구시렁댄다 / 지가 열일곱살이야 열아홉살이야 // 구시렁구시렁 눈이 내리는 / 산등성 숨차게 올라가는데 / 칠십 고개 넘어선 노인네들이 / 여보 젊은이 함께 가지 // 앞지르는 나를 불러 세워 / 올해 몇이냐고 / 쉰일곱이라고 / 그 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 조오홀 때다 // 살아 천년 죽어 천년 한다는 / 태백산 주목이 평생을 그 모양으로 / 하얗게 눈을 뒤집어쓰고 서서 / 좋을 때다 좋을 때다 / 말을 받는다 // 당골집 귀때기 새파란 그 계집만 / 괜스레 나를 보고 / 늙었다 한다”

정희성 시인의 <태백산맥>인데, 시 내용이 재미있지 않는가? 칠십이 넘은 노인들이 쉰일곱인 시인을 ‘젊은이’라고 부르면서 ‘조오홀 때’라고 농담을 하고 있구먼. 하지만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주목의 눈에는 100년도 못 산 저 노인들도 ‘좋을 때’로 보일 것이네. 이런 걸 보면 ‘늙음’이라는 게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건 아니지. 60살이 넘어도 진취적인 생각과 꿈을 갖고 살면 아직‘청춘’이고, 아무리 젊어도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하면 노인이나 마찬가지야. 그런데 주위에 많은 또래들이 벌써 노인 흉내를 내는 것을 보면 마음 아프다네. 육체적으로는 늙어가더라도 심리적·정신적으로는 계속 젊음을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추하게 낡아가는 노인들이 많아서 보기 민망하더군. 왜 나이가 들면 스스로 보수적이 되면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사는지…

마지막으로 고은의 <그 꽃>이라는 시이네. “내려갈 때 보았네 / 올라갈 때 못 본 / 그 꽃.” 아주 짧지만 여운이 길게 남는 시이지. 실제로 산에 다니다 보면 저런 경우도 많다네. 산에 오를 때는 분명히 눈에 띄지 않았는데, 내려오다가 방긋 웃는 얼굴로 날 기다리고 있는 꽃을 만날 때가 많지. 그럴 때면 ‘그 꽃’에게 큰 죄를 지은 것처럼 미안하더군. 설날인 오늘은 저 짧은 시를 삶을 성찰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읽고 싶네. 어떤 한 가지 목표를 정해놓고 거기에만 집중하다 보면 우리들 삶에서 진짜 중요한 것들을 많이 놓치게 되지. 요즘처럼 돈이 유일한 삶의 목표가 되어버린 세상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권력과 자본이 텔레비전 등 대중매체를 통해 보여주는 부의 허상들을 ‘풍성한’ 삶인 것처럼 받아들이면서 살고 있네. 그러니 대중매체가 보여주지 않는 삶의 많은 부분들은 놓칠 수밖에 없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우리처럼 나이 든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끄고 조용히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저녁 시간을 많이 가졌으면 좋겠네.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고요한 방에 들어 앉아 휴식할 줄 모른다는 데서 비롯된다."고 파스칼이 말했지. 다시 말하지만, 생각하는 노인이어야만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제대로 볼 수 있네.

60살부터를 흔히 ‘인생의 제3기’라고 말하지. 우리 육신이 태어난 갑오년으로 다시 돌아와 새로 시작하는 삶이 지난 60년의 반복이어서는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네. 물론 쉽지는 않을 걸세. 하지만 난 쓸데없는 욕심만 버리면 누구나 가능하다고 생각하네. 그래서 소욕지족, 작은 것들에 만족하면서 살고 싶네. 우리도 이젠 삶에 꼭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하나씩 버리는 연습을 시작할 나이에 접어들었네. 지난 60년 동안 알게 모르게 우리들 몸에 밴 습속들 다 버리고, 더 자연친화적으로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가세. 천상병 시인처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에 우리가 살았던 삶이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면서 귀천할 수 있게 열심히 살아 보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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