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시사위크]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설치하고, 모든 이슬람교도의 입국을 막을 것이며, 국가 안보를 위해 고문을 허용하고, 관타나모 테러용의자 수용소는 폐쇄하지 않고 오히려 확장할 것이다. 중국과의 교역에 45%의 관세를 부과할 것이고, 한국 일본 사우디아라비아 등 군사동맹국들 위해 미국이 부담하고 있는 지원금도 대폭 삭감하거나 없앨 것이다.”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이냐고? 놀라지 말게나. 현재 미국 공화당의 유력한 대선 주자인 도널드 트럼프의 입에서 나온 말들을 간단하게 요점 정리해 본 것이네.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도 저런 황당하고 믿기 어려운 일들이 실제 일어날 가능성이 있냐고? 물론 일어나서는 안 되겠지. 하지만 누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600만 유대인을 학살했던 히틀러도 독일 국민들의 선거에 의해 수상이 되고 총통이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만 언급하고 싶네.
 
시대착오적인 주장과 ‘19욕설이 난무하는 미국 대선전을 보고 있으면 미국 사회도 우리 못지않은 중병에 걸린 것처럼 보이네.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 기성정치판에서 아웃사이더였던 사람들의 돌풍이 거세네. 두 당의 이른바 주류라는 사람들이 아웃사이더들의 반란을 잠재우기 위해 허둥대는 꼴들이 보기 민망할 정도일세. 특히 공화당에서는 2012년 대통령 후보였던 사람까지 나서서 자기당 후보 지명전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사람을 가짜고 사기꾼이라고 비판하는구먼. 아들 부시 대통령 시절 이라크 전쟁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네오콘의 한 이데올로그는 트럼프를 공화당이 만들어낸 프랑켄슈타인 괴물에까지 비유할 정도야. 자기는 트럼프가 지명되면 상대당 후보인 클린턴을 찍을 거라나.
 
민주당에서 아직까지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의 대세론을 위협하고 있는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도 아웃사이더인 것은 마찬가지일세. 자칭 민주적 사회주의자인 그는 한줌도 안 되는 아주, 아주, 아주 부유한 사람들이 우리의 정치적 삶과 언론, 경제에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고 기성정치판을 비판하면서, 소득과 부의 불평등 해소, 국공립 무상 대학등록금, 대형 금융기관 해체, 처방약 가격 인하 등 지금까지 대다수 미국 정치인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껄끄러운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네. 개인의 자유와 재산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고 좌파가 정치세력화 되어 있지 않은 미국에서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드문 현상이지. 물론 그가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중앙집권적 계획 경제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선거 운동이 젊은이들에게 많은 충격을 주고 있는 건 사실인 것 같네.
 
그럼 왜 비교적 안정적인 정치 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받았던 미국에서마저 아웃사이더들의 돌풍이 거셀까? 기성 워싱턴 정치에 대한 환멸, 기존 양당 정치리더십에 대한 불신, 국제 정치 경제 무대에서의 미국 지위의 후퇴, 경제적 불확실성 등 다양한 요인들이 언급되고 있지만, 나는 40여 년 전부터 시작한 신자유주의적인 지구화와 그 부정적인 결과들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하네. 금융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중시하는 주주자본주의가 고용 없는 성장을 만들고, 기업의 이익 창출을 우선하는 구조조정의 여파로 일자리를 잃은 중간계급들이 늘어나면서 노동자들에게 돌아가는 몫은 늘어나지 않았으니, 대다수 사람들은 그들의 삶이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개선되지 않고 있음을 느끼게 된 거지. 실제로 예전보다 더 많은 시간 일을 해도 살기 힘들어진 사람들도 많아졌고. 그러니 샌더스의 말이 설득력이 있을 수밖에. “이번 선거는 단순히 대통령 한 명을 뽑는 선거가 아닙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이면서 시민들은 두 가지, 세 가지 일을 해야 겨우 살 수 있는 불평등의 나라,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감옥에 가두고 있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하는 선거는 그런 미국을 바꾸려는 선거입니다.” 옳은 지적 아닌가?
 
미국 에모리대학교 정치학자 앨런 아브라모위츠(Abramowitz)의 연구에 따르면, 많은 핵심 쟁점에서 일반 민주당원과 공화당원의 이데올로기 격차가 확대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네. 1972년부터 2008년 사이에 그 격차가 거의 두 배로 벌어졌다는군. “지난 36년 동안 민주당 유권자들은 중도좌파에서 좌파로 이동한 반면, 이미 우파적이던 공화당 유권자들은 극우로 이동했다.” 양당 모두 과거에 보여주었던 정치적 중도로부터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는 거야. 경제적 양극화가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있는 거지. 그러니 의료보험 같은 핵심 쟁점에서 타협이 이루어지기 힘들고, 타협을 시도하는 정치인들이 양당에서 인기가 없을 수밖에. 지금 공화당에서 1위와 2위를 달리고 있는 후보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타협을 모르는 극우에 가까운 사람들이야.
 
올해 11월에 있을 선거에 누가 양당 후보로 나서고, 또 누가 차기 대통령에 당선될지 지금으로서는 아무도 자신 있게 예측할 수 없지만, 미국 시민들(?)과 정치 체제 모두 지쳐 있고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힘에 겨워하는 것은 분명해. 자신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 쟁점들에 관해 차근차근 냉철하게 따지기보다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새로운 자극들을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도 사실이고.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예전 같은 여유가 없으니 쉬운 길을 알고 있다는 거짓 선지자의 말에 쉽게 쏠릴 수밖에 없지. 심지어 미국의 민주주의에는 이미 치료제가 없으니 바닥에까지 내려가 봐야 미국 사회가 정신을 차릴 것이라는 심정으로 트럼프를 지지한다는 사람들도 있다니미국이나 우리나 비슷한 중병을 앓고 있는 것은 분명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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