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처음 후보단일화를 시도하려 했던 김대중(사진 중간) 전 대통령과 김영삼(사진 오른쪽) 전 대통령. 사진 왼쪽은 김 전 대통령의 영부인인 이희호 여사. <사진 제공 독자 정태원씨/뉴시스>

[시사위크=최영훈 기자] 25일 바른정당에서 제안한 ‘反(반)문재인연대’ 후보 단일화가 5·9 대선정국의 막판 변수로 떠올랐다. 이날 바른정당은 의원총회에서 ‘반문연대’ 후보 단일화를 자유한국당·국민의당에 각각 제안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홍준표 한국당 대선후보가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후보와의 연대 불가론을 내세우고, 국민의당도 ‘자강론’으로 단일화 제안을 사전 차단해 바른정당發(발) ‘반문연대호’는 닻을 올리기도 전에 가라앉는 분위기다.

우리나라 정치사에서 대선후보 단일화 움직임은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6차례의 대통령 선거 가운데 1992년 14대 대선을 제외하고 5차례 있었다. 모두 범진보진영을 주축으로 한 대선후보 단일화 시도였다. 첫 시도는 1987년 13대 대선으로 당시 김영삼 통일민주당·김대중 평화민주당 후보간 야권후보 단일화였다.

당시 김영삼·김대중 후보는 서로에게 대선후보 자리를 양보하겠다고 밝힐 정도로 돈독한 사이였지만, 단일화 협상 과정에서 후보간 감정의 골이 깊어지고 당권 분할 문제 등을 둘러싼 합의가 진척되지 못하면서 결국 불발로 그쳤다. 13대 대선에서는 노태우 당시 민주정의당 대선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로 인해 당시 두 후보는 야권으로부터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승리를 헌납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후 2007년 17대 대선에서도 정동영 당시 대통합민주신당 대선후보와 문국현 창조한국당 대선후보, 이인제 민주당 후보간 단일화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와의 지지율 격차가 컸던 탓에 실제로 성사되지는 못했다.

야권후보 단일화 시도는 2012년 18대 대선에서도 벌어졌다. 당시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와 안철수 무소속 후보는 단일화 논의 과정에서 갈등을 겪다가 그해 11월 23일 안 후보가 전격 사퇴하는 것으로 막판 단일화가 성사됐다. 다만 일방적인 대선 불출마 선언에 따른 후보단일화는 충분한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했고,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에게 패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반면, 후보 단일화 시너지 효과로 대선 승리까지 이어진 경우도 있었다. 1997년 15대 대선 당시 새정치국민회의를 이끌던 김대중 총재와 김종필 자유민주연합 총재가 그해 11월 3일 대선후보 단일화 합의문에 서명해 ‘DJP 연합’을 성사시켰다. 진보와 보수가 손을 잡은 DJP연합은 당시 한나라당 대선후보로 출마한 이회창 후보를 꺾었고, 15대 대통령으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됐다. 김대중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는 김종필 총재였다.

이 같은 성공 사례는 2002년 16대 대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2002년 16대 대선 당시 노무현 민주당 후보와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간 단일화 과정은 치열했다. 당시 두 사람은 단일화를 위한 여론조사 방식을 두고 심각한 갈등이 있었고, 막판에 노 후보가 정 대표의 여론조사 방식을 수용해 극적 합의를 이뤘다. 이후 단일화 후보 선출을 위한 여론조사에서 노 후보가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대선 전날 정몽준 대표의 지지철회로 후보단일화 합의는 사실상 깨졌다. 그럼에도 노 후보는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눌렀고, 16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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