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범 전 국방홍보원장.

[시사위크] 문재인 대통령은 3박 5일간의 방미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지 이틀 만인 7월 5일, G20 정상회의 참석차 독일로 떠났다. 7박 11일의 미국과 유럽 일정을 모두 마치고 귀국한 날은 대통령 취임 딱 두 달째 되는 7월 10일이었다. 역대 어느 대통령도 겪지 못한 취임 초기의 강행군이다.

주요 20개국 정상회의 기간 중에는 9개국의 정상들이 회담을 제의했지만 두 나라의 요청만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겨울 내내 타올랐던 촛불혁명이 탄생시킨 한국의 대통령을 바라보는 외국 정상들의 관심은 각별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번 한·미 정상회담과 G20 정상회의 참석을 계기로 6개월 이상 지속된 대한민국의 외교공백을 취임 두 달 만에 말끔히 해소하고 자연스럽게 국제무대에 데뷔했다. 그런 점에서 국내외 언론들도 기대 이상의 성공작으로 평가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집권 여당은 물론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도 문재인 대통령의 이번 외교성과에 후한 점수를 줬다.
 
해외경험이 부족한 문재인 대통령의 방미를 앞두고 국내 언론에서 많은 것을 우려했던 것도 사실이다. 비단 사드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처음엔 ‘과락(科落)’을 우려했는데 끝나고 보니 A학점을 받은 셈이라고나 할까. 이처럼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은 문 대통령의 이번 해외 순방 외교가 성공할 수 있었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일부 언론에서는 그것을 문재인 대통령 특유의 감성외교에서 찾기도 한다. 그의 감성적인 어휘 구사와 자신을 낮추는 겸손 모드가 국제무대에서도 그대로 통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매우 일리 있는 분석이라고 본다. 하지만 꼭 그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구사하는 언어를 꼭 감성적인 어휘라고만 한정짓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그의 연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통령 연설 매뉴얼’이라는 규범적인 틀에서 과감히 벗어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과거 대통령 연설에서 관행적으로 유지돼 온 ‘스테레오 타입(Stereo type)’에서 완전히 탈피했음을 의미한다. 예컨대 연설의 주체(대통령)는 늘 지엄해야 하고, 주체와 객체 사이에는 상하관계가 분명함을 알 수 있는 어휘가 사용돼야 하는 식이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은 어느 대통령과 달리 진한 감동을 밑바닥에 깔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 중 압권은 역시 광주민주항쟁 37주년 기념식장에서 행한 5.18 기념사였다. 그날 대통령의 연설은 시작부터 끝까지 감동의 연속이었다. 참석한 유가족은 물론 이를 지켜본 수많은 시청자들까지도 눈물을 훔쳤다.
 
37년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그것은 대통령의 미사여구 때문이 아니었다. 5.18 국립묘지라는 현장이 안고 있는 본질에 가장 부합되는 어휘를 선정해 낮은 자세로 청중에게 소구(所求)해 들어갔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그런 감격스런 장면은 이역만리 미국에서도 나타났다. 문재인 대통령은 방미일정 첫째 날, 트럼프 대통령 대신 6.25 당시 유엔군의 최대 격전지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찾아 헌화하고 영령들의 넋을 위로했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이 같은 행보는 미국의 참전용사들에게는 알링톤 국립묘지 참배 이상의 의미로 받아들여졌고, 그 감동은 백악관에까지 전달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정상회담 만찬 연설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장진호 전투기념비 참배 연설내용을 언급하면서 자신도 큰 감동을 받았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첫 번째 방미 일정 중 첫 번째 방문지를 장진호 전투 기념비 참배로 정한 것은 매우 사려 깊은 결정이었다. 장진호 전투는 1950년 11월 27일부터 약 2주 동안 극한의 상황 속에서 중공군에 포위된 상태로 생사를 넘나들며 사투를 벌인 최대 격전지였고, 그 전투로 말미암아 흥남철수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연설에서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가 없었더라면 제가 이렇게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장진호 전투와 자신의 출생을 연결지어 강조했다.

이처럼 스토리가 있는 연설은 67년 전 장진호 전투에 참전했던 미국 노병들의 가슴을 울렸다. 문재인 대통령은 기념비 현장에 나와 있는 80을 훨씬 넘긴 참전 노병에게 정중히 머리 숙여 인사를 했다. 놀란 사람은 참전 노장이었다. 군인 출신 대통령이라면 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자신의 연설을 듣던 중 눈시울을 붉히는 한 참전 노병의 모습을 안경 너머로 뚫어지게 응시하는 문 대통령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그것은 5.18 기념식 때 한 여성 유가족의 연설을 지켜보다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던 문 대통령의 모습과 오버랩 됐다. 이처럼 순식간에 이뤄지는 장면들은 기본적으로 대통령의 심성이 순수하고 진정어린 자세가 아니면 드러날 수 없는 동작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자신에 대한 의전과 경호 스타일을 전면 쇄신했다. 장·차관과 청와대 주요 직위자 등을 임명하거나 임명장을 줄 때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라. 과거와는 확연히 다른 풍경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대통령이 아니라 임명장을 받는 사람이 주인공이 되는 낯선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임명식 장면을 상기해 보라. 꽃다발을 든 신임 부총리 부부가 맨 앞줄 중앙에 서 있고, 그 왼 쪽 끝에 문재인 대통령, 그 뒤로 청와대 수석들 10여 명이 박수를 치며 축하하는 모습은 따뜻하고도 아름다운, 전에 보지 못한 장면이다. 간단한 의식이지만 그날의 주인공이 제 자리에 설 수 있도록 해 준 대통령의 세심한 배려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 때까지도 행사 참석자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난 뒤 대통령은 혼자 입장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은 이런 모습을 일거에 바꿔버렸다. 지난 6월 15일 주요 보훈 대상자 초청 청와대 오찬 행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행사장 입구에 나가 참석자들을 일일이 영접했다.

예전 같으면 초청자들은 일찍 와서 대기하고 있다가 ‘대통령 입장’이라는 멘트가 나오면 기립박수로 대통령을 맞이하곤 했다. 그러나 현직 대통령이 참전 유공자에게 정중히 인사하는 모습은 과거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이 같은 시도는 광주 5.18 기념식 때 과거와는 달리 일반 참석자들과 나란히 함께 행사장에 입장하면서 처음 선을 보였고, 현충일과 6.10항쟁 30주년 기념식 등에서도 이런 신 개념의 의전 스타일을 지켜나갔다. 모든 행사는 대통령을 위한 행사가 아니라 국민을 위한 행사가 되어야 한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평소 애민관이 스며든 의전철학이 아니고는 기대하기 어려운 변화라고 본다.

취임한지 불과 두 달 만에 세계 외교무대에 데뷔한 문재인 대통령의 성공비결은 단순히 상대방의 감성에 호소하는 감성외교라기 보다는 평소 그의 꾸밈없는 말과 행동 그리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지한 자세, 즉 문재인 스타일의 외교가 가져 온 결과물로 이해하고 싶다.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진심어린 마음과 태도는 결코 나약함의 표시가 아니다”라고 역설했다. 그렇다면 평소 문재인 대통령이 품고 있는 진심어린 자세도 바로 그런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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