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공농성 100일차를 앞둔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 소속 노조원들(왼쪽)과 지난 5월 사우디 해운사 바흐리와의 MOU체결식에 참석한 정기선 전무.

[시사위크=권정두 기자] 두 사람이 있다. 유난히 일찍 찾아온 폭염과 장마철 폭우 속에서 고가도로 교각 위 고공농성을 이어가는 중이다. 지난 4월 시작된 고공농성은 오는 19일 100일을 맞는다. 그동안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고, 각종 새로운 정책도 추진됐지만 이들은 여전히 그곳에 있다.

우리나라 산업계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자랑이었던 조선업은 최근 몇 년간 큰 위기를 겪었다. 그것도 너무나 순식간에 쓰나미처럼 덮친 위기였다. 가장 혹독한 대가를 치른 것은 현장의 노동자들이었다. 고용노동부의 통계에 따르면, 지난 1년간 조선업종 노동자는 6만7,000명이나 감소했다. 6만7,000명이 일자리를 잃은 것이다. 이 중 비정규직 하청노동자들이 5만5,000명이나 됐다.

하지만 이들이 그저 일자리를 잃어 고공농성에 나선 것은 아니다. 안 그래도 어려운 환경 속에서 ‘노조’라는 이유로 일말의 희망조차 허락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공농성 중인 전영수 씨와 이성호 씨는 현대미포조선 하청업체에서 일했으며,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속해있던 하청업체가 폐업 움직임을 보였고, 이에 두 사람은 현대중공업 및 현대미포조선의 다른 하청업체 수십 곳에 이력서를 넣었다. 하지만 이들을 받아주는 곳은 어느 곳도 없었다.

비단 현대중공업 뿐 아니다. 다른 조선업체에서도 유독 노조 활동 경력이 있는 이들이 재취업에 난항을 겪고 있다. 이들은 박근혜 정부가 국민들의 치를 떨게 만들었던 ‘블랙리스트’를 그 이유로 지목한다. 조선업계 하청업체 노조의 싹을 자르기 위한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블랙리스트의 존재는 아주 교묘하게 가려져있을 수밖에 없다. 고용위기가 심각한 지금 상황에는 더욱 그렇다. ‘조선업의 위기’라는 아주 좋은 명분으로 노조 파괴를 가릴 수 있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노력해온 하청업체 노조원들은 보이지도 않는 존재에 의해 생업에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다. 두 사람이 100일째 교각 위를 지키고 있는 이유다.

조선하청노동자 대량해고저지를 위한 시민사회대책위원회 회원들이 지난 17일 기자회견에서 블랙리스트를 형상화한 손 피켓을 들고 있다. <뉴시스>

◇ 위기 속 ‘마이 웨이’ 걷는 정기선 전무

또 다른 사람이 있다. 칼바람이 몰아치는 조선업계 위기 속에서도 홀로 승승장구를 이어가고 있는 사람이다. 1982년생, 올해로 36살인 그는 현대중공업의 유일한 30대 임원이자 최연소 임원이다. 이미 2014년에 임원으로 승진했고, 현재는 전무 직함을 달고 있다. 바로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의 아들 정기선 전무다.

정기선 전무는 2009년 현대중공업에 대리로 입사했지만 곧장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2013년 부장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1년 만에 곧장 상무가 됐다. 남들은 20년 넘게 일하고, 버텨야 오를 수 있는 자리지만, 정기선 전무는 그렇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정기선 전무가 임원에 오른 직후 조선업계 위기가 닥쳐왔다. 일자리를 잃은 것은 현장 노동자만이 아니었다. 임원들도 칼바람을 피할 수 없었다. 임원 수 자체도 크게 줄었다.

하지만 정기선 전무는 또 다시 승진하는 등 ‘마이 웨이’를 이어갔다. 조선업의 위기, 현대중공업의 위기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행보였다. 어려운 회사 사정을 이유로 많은 이들이 잘려나갔지만, 신규 수주 등 좋은 소식이 있을 땐 늘 정기선 전무가 등장했다. 위기에 따른 고통은 다른 이들의 몫이었고, 희망적인 성과는 정기선 전무의 업적으로 쌓였다.

이는 누구나 인지하고 있는 ‘후계자’ 정기선 전무의 앞날을 위한 명분으로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덕분에 정기선 전무의 행보는 ‘신화’에 가까울 정도다. 2013년 32살 부장으로 회사에 돌아와 최악의 위기 속에서도 임원 승진을 거듭하며 큰 성과를 이어가고 있는 인물이다.

현대중공업의 두 상반된 이야기는 마치 북한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북한 김정은 역시 정기선 전무와 비슷한 나이에 등장해 주요 직함을 초고속으로 거쳤고, 각종 업적을 쌓았다. 반면, 그 사이 여러 위기로 인해 북한 주민들은 힘든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현대중공업에서는 많은 이들이 순식간에 일자리를 잃고, 심지어 교각 위에 올라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는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적폐 청산’을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당연하지 않음에도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들을 하나 둘씩 제자리로 돌려놓는 중이다. ‘노조’라는 낙인이 찍혀 일자리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는 것. 재벌가 자제란 이유로 독보적인 후계자의 길을 걷는 것. 그리고 이 일들이 한 회사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과연 ‘당연한’ 일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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