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의 학교폭력 근절대책 '키바'는 국가 주도의 자살예방대책의 힘을 보여준 사례다. <'키바 코울루' 프로그램 홍보 페이지>

[시사위크=현우진 기자] 세계보건기구(WHO)가 제공하는 국가별 자살통계 지도를 보면 자살 예방이 전 세계의 공통과제라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자살률이 낮을수록 색이 연하게 칠해지는 이 지도에서 ‘상대적 안전국가’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은 중국과 지중해·파나마 해협 인근의 일부 국가들뿐이다. 인도·중앙아프리카 이남과 위도 35도 이북국가들은 대부분 인구 10만명당 자살인구가 15명을 넘는다.

지도에 따르면 한국의 자살률은 2010년 27.9명에서 2015년 24.1명으로 낮아졌지만, 2000년 기록인 14.2명에 비하면 여전히 높다. 자살예방을 위한 국가·사회적 노력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반면 정부가 자살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예방대책을 적극적으로 주도하고 있는 나라들도 있다. 이들은 모두 지역사회와 연계한 대응책을 펴고 국가가 취약계층을 직접 돌보러 나섰다는 공통점이 있다.

◇ 선진국의 자살 대책은 무엇?

미국의 자살률은 2000년대 들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빈곤지역에 횡행하는 마약·알코올 중독과 2008년 금융위기 등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캘리포니아·오리건 등 일부 주는 의사가 자살을 처방하는 ‘의사조력자살’을 합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사태가 심각해질 기미를 보이자 미국 정부는 2001년 ‘국가 자살예방대책’을 발표했다. 13개 목표와 60개 세부과제 속에 연방정부·주정부·민간사업자와 지역사회·종교조직의 역할을 개별적으로 규정한 이 예방대책은 가장 명확하게 자살예방목표를 설정하고 추진한 사례로 뽑히고 있다. 최근에는 미국 정신건강청(SAMHSA)이 “학교·기업·의료시스템·임상전문의뿐 아니라 자신의 가족과 친구를 지키기 위한 모든 미국인의 역할을 강조한다”는 내용을 담은 자살예방대책을 발표하고 실행을 주도하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모든 미국인의 자살사례와 미국 정부의 자살예방대책을 수집·평가하는 자살예방자원센터(SPRC)다.

2000년대 들어 ‘독보적인 아시아 1위 자살국가’라는 오명을 썼던 일본은 2006년 ‘범정부 자살예방대책’을 발표하고 나섰다. 정신건강진료와 지역사회의 통합을 목표로 자살예방대책본부를 설립·운영했으며 자살예방주간 시행 등 자살의 심각성을 인식시키기 위한 홍보활동이 전국적으로 시행됐다. 일본 정부가 자살예방대책에 투자한 예산은 2013년 기준 3,140억원에 달한다.

가시적인 성과는 2010년경부터 나타났다. OECD 통계에 따르면 일본의 자살률은 2009년 22.2명에서 2014년 17.6명으로 낮아졌다.

'입원 중심'에서 '지역사회 중심'으로 이동해온 핀란드 정신과진료. <그래프=시사위크>

◇ 지역사회 친화적 예방정책으로 성과 이끌어낸 핀란드

핀란드의 자살률은 2015년 기준 14.2명으로, OECD 평균 자살률 12.0명보다 다소 높다. 그러나 이는 21.7명을 기록했던 2000년도 자살률에 비하면 극적으로 낮아진 수치라고 부를 만하다. 핀란드가 자살예방 분야의 성공사례로 가장 자주 거론되는 나라가 된 이유다.

핀란드는 OECD가 권고한 자살예방대책방향인 ‘입원 중심에서 지역사회 중심으로’의 대표주자다. OECD 보고서에 따르면 핀란드의 외래환자 정신건강진료 지출은 2000년 5,210만유로에서 2010년 1억3,180만유로로, 정신의학 전문병원의 외래환자 진료비는 동기간 1억2,930만유로에서 2억유로로 증가했다. 의료시설 이용이 힘들고 대인교류가 적어 ‘자살 고위험군’으로 분류되는 외지 거주민들은 적극적으로 보급된 화상진료 시스템을 이용해 진료를 받았다. 반면 입원환자에 대한 치료비용은 4억8,210만유로에서 3억9,740만유로로 감소했다.

한편 동기간 청소년층을 대상으로 진행된 학교폭력 근절 프로그램은 자살의 제1원인인 사회적 소외문제를 해소하는 결과를 낳았다. 핀란드 교육부의 지원을 통해 2006~7년부터 시행된 ‘키바’ 프로그램은 전 세계에서 가장 효과적인 청소년 자살방지대책 중 하나로 뽑힌다. 키바 프로그램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대신 학생층 대다수를 차지하는 ‘방관자’의 역할을 강조하며 구성원의 공감대 형성을 유도했다. UCLA가 핀란드 학생 7,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연구는 ‘키바’ 프로그램을 경험한 학생들의 학교폭력 노출횟수가 50~66% 가량 낮아졌다고 밝혔다.

2000년부터 2011년까지 핀란드의 자살률은 25.8% 감소했다. 의료시설에 대한 취약계층의 낮은 접근성과 학교폭력 등 같은 문제를 공유한 한국의 자살률은 동기간 100.6% 증가했다. “일반적으로 정신건강은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되기 마련이지만,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학교·국가 단위의 프로그램은 매우 효과적이었다”는 UCLA 연구진의 키바 프로그램에 대한 평가는 보다 지엽적인 한국의 자살예방정책에 경종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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