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피해자들의 말하기 운동인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 캠페인이 정치권으로 번지고 있다. 사진은 '미투 운동 그 이후, 피해자가 말하다'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 사건 공동대책위원회 기자회견에서 연출가 이윤택 사건 변호인, 피해자, 대책위 관계자들이 진상규명 촉구 피켓을 들고 있는 모습.<뉴시스>

[시사위크=은진 기자] 성폭력 피해자들의 말하기 운동인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 캠페인이 정치권으로 번지고 있다. 안희정 충남도지사의 성폭행 가해 사실이 폭로된 데 이어 국회 의원실 보좌진들의 성폭력 가해 사실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해당 폭로로 안 지사는 충남지사직을 사퇴했고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모 보좌관은 면직처리 됐다. 정치권 내에서는 “터질 일이 터졌다”는 분위기다. 한편에서는 “미투 운동이 아니었으면 영원히 묻혔을 것”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폐쇄적인 조직인 정치권에선 ‘성폭력 고발’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각 국회의원실에 소속된 여성 보좌진들은 “국회야말로 태풍의 눈”이라고 입을 모은다. 열악한 처우와 ‘별정직 공무원’이라는 독특한 고용형태 탓이다.

국회의원은 4급 보좌관 2명, 5급 비서관 2명, 6·7·8·9급 비서와 인턴 등 9명을 보좌진으로 둘 수 있다. 인사권은 전적으로 의원에게 있다. 공채 시스템이 따로 있지는 않고 채용과 승진, 퇴사까지 의원이 결정한다. 상당수 의원들은 4급 보좌관에게 인사를 일임하고 있지만, ‘의원님’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다. ‘모셨던’ 의원이 다음 선거에서 낙선하거나, 의원직을 상실했을 경우 보좌진들은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된다. 다른 의원실로 ‘이직’을 하기 위해서는 평판 관리가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한 의원실 여성 비서는 “성추행 같은 일을 고발했다가는 ‘내부 고발자’로 찍혀 채용도 쉽지 않다”고 털어놓았다.

익명으로 고발할 수 있는 ‘여의도 옆 대나무숲’ 페이스북 페이지가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투 운동이 시작된 이후에는 국회의원이나 보좌진의 성희롱·성폭력과 관련된 글이 주를 이뤘다. “몇 년 전 모 비서관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밝힌 한 직원은 “녹취와 문자기록을 갖고 있었고 사건 직후 해바라기센터에 달려가 몸 상태를 체크하고 기록을 남겨뒀기 때문에 얼마든지 신고할 수 있었지만 못했다. 그 비서관의 회관 내 인맥이나 영향력이 두려웠고, 경찰 조사를 받으면 기자들 내부보고용 카톡(SNS) 혹은 경찰 정보과발 찌라시가 돌 수도 있는데 제 신원이 밝혀질 것이 두려웠다”고 했다.

이 직원은 “한동안 속이 썩어 들어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지만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국회의원회관은 사실상 치외법권인 곳이기 때문”이라며 “저같이 속으로 삼킨 여자 보좌진분들 많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위계를 이용해, 친분을 이용해 교묘하게 성을 희롱하는 악랄한 행위가 반복돼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다른 직원은 이 페이지에 “왜 대한민국 최고의 권력이 모인 여의도 국회는 조용할까요? 성폭력은 권력의 문제인데 왜 누구보다도 이 나라에서 최고 권력의 중심에 있는 이 곳만 조용할까요? 이 동네가 정말 깨끗하고 누구보다 젠더감수성이 높고 정의롭기 때문일까요? 국회의원의 사노비라고 불리는 보좌진, 그리고 각 정당의 관계자들의 피해 폭로는 왜 없을까요?”라고 적어 국회 내 만연한 성폭력 실태를 암시했다.

◇ 정치권 내 성폭력 고발 이제 시작… 올바른 대책은?

이런 흐름 속에서 실명을 내건 국회 첫 ‘미투’가 나왔다. 자신을 현직 5급 비서관이라고 밝힌 정 모씨는 5일 국회 홈페이지 국민제안 게시판에 글을 올려 “2012년(19대 국회)부터 3년 여간 근무했던 의원실에서 벌어진 성폭력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며 “당사자(가해자)에게 항의도 해보고 화도 내봤지만 소용없었다. ‘가족만큼 아낀다’ ‘동생 같아서 그랬다’며 악의 없는 행위였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만 늘어놨다”고 고발했다.

그는 “퇴직자가 아닌 이상 같은 업무 공간에 존재하는 전·현직 의원실의 가해자를 고발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비교적 의원실 상급자에 속하는 직급을 갖고 있는 저는 항의라도 했지만, 직급이 낮으면 낮을수록 약자일 수밖에 없는 비서들은 말조차 꺼내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피해자의 자기 고백은 치유의 시작이기도 하다. 숨죽이며 살아가고 있는 많은 피해자들이 스스로의 치유를 위해 함께 나설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덧붙였다.

가해자로 지목된 홍 모씨는 정씨의 고발 직후 면직 처리됐다. 성폭력 가해 당시 더불어민주당의원실에 있었던 홍씨는 현재 바른미래당의 한 의원실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해당 의원실은 6일 보도자료를 내 “저희 보좌관이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됐다는 점에서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발생했고 바로잡아야 할 부분은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국회는 본격적으로 시작된 정치권 내 성폭력 고발을 계기로 국회 내 남성우월적 문화를 개선하고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논의에 속도를 낼 예정이다. 국회 여성가족위원회는 예비비를 투입해서라도 관련 정책을 제대로 정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여가위 관계자는 “지금 성폭력을 고발하는 피해자들에게 가장 어려운 점은 생존권이다. 고발 이후에 (피해자의) 생존이 위태로워진다는 것”이라며 “접근 방식을 바꿔야한다. 조직 입장에서 봐도, 성폭력을 하는 가해자는 조직에 해를 입히는 존재다. 피해자의 생존권을 보장하고 가해자가 경제적 제재를 받게 해야 한다”며 가해자의 피해자에 대한 ‘인사보복’을 막는 것을 최우선으로 둬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관련 논의를 심화하기 위한 토론회도 개최된다. 남인순 의원실, 정춘숙 의원실, 윤종필 의원실, 신용현 의원실, 박홍근 의원실, 국회 아동·여성·인권정책포럼은 3·8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해 오는 7일 ‘성평등한 국회 더 좋은 민주주의’ 토론회를 개최한다. 이 자리에선 성평등한 국회를 만들기 위한 점검과 향후 과제를 제안하는 토론이 진행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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