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의 회장 폴 엘리엇 싱어. 엘리엇은 최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과 관련해 한국 정부를 대상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있다. <뉴시스/AP>

[시사위크=현우진 기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다시 한국에 공세를 취했다. 이번엔 정부가 대상이다.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건에 국민연금이 찬성표를 행사한 것을 두고 투자자·국가 분쟁해결 제도를 들고 나왔다. ‘벌처 펀드’로 악명 높은 엘리엇을 바라보는 국내의 시선은 곱지 않지만,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매우 민감한 주제가 걸려 있기 때문에 정부로서도 마땅한 대응책을 찾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 엘리엇, “국민연금 개입으로 삼성물산 주주 피해” 주장

투자자·국가 분쟁해결(ISDS)은 외국인 투자자가 투자처 국가의 법령·정책 등으로 인해 손해를 봤을 경우 해당 국가를 대상으로 직접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제도다. 세계은행 산하의 국제 투자분쟁 해결센터나 유엔의 국제무역법 위원회가 소송을 주관한다. 한국은 미국과 FTA를 통해 양국 투자자가 해당 제도를 이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으며, 칠레·싱가포르 등과 맺은 자유무역협정에도 같은 조항이 포함돼있다.

엘리엇이 말하는 ‘투자처 국가에 의한 손해’는 지난 2015년 7월 발생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건을 가리킨다. 당시 삼성물산에 약 7%의 지분을 갖고 있던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주식 가격이 지나치게 낮게 평가(삼성물산 1주=제일모직 0.35주)됐다며 반대했지만, 최대주주인 국민연금이 찬성표를 던지면서 표결은 손쉽게 주주총회를 통과했다. 이 과정에서 삼성물산의 주식이 저평가되면서 주주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주장이다.

엘리엇은 1일(현지시각) 발표한 입장표명문에서 “전 대통령부터 국민연금까지 얽힌 ‘부패의 연쇄’가 엘리엇과 다른 삼성물산 주주들에게 부당한 피해를 입혔다”며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엘리엇은 공식 제소 전 절차로서 법무부에 중재의향서를 제출한 상태며, 엘리엇이 제시한 구체적인 손해배상액수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 미심쩍은 합병 찬성 결정이 불러온 ‘자승자박’

문제는 엘리엇의 합병 반대 주장에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는 점이다. 2015년 7월 당시 한화투자증권 리서치센터에서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의 의견발표를 정리해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ISS와 글라스루이스 등 유명 의결권 자문사들은 모두 삼성물산 투자자에게 불리한 합병 비율을 이유로 반대의견을 냈다. 보고서를 작성한 한화투자증권 또한 “삼성물산 주주 입장에서는 이번 합병이 무산되고 향후 재추진을 원할 것”이며, 국민연금에 대해서도 “반대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을 제시했다.

엘리엇에 대한 국내 여론은 부정적이다. 한국 기업의 미래엔 관심이 없으며, 단기투자수익을 노린 투기자본일 뿐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이번 ISDS 사태의 근본적인 쟁점이 그룹 오너에게 비정상적인 권한을 부여하는 한국 특유의 재벌경영제도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승계를 위한 작업이며, 이 과정에 청와대도 개입했다는 의혹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리를 둘러싼 각종 논란 속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해가 바뀌면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관여한 인사들은 줄줄이 재판장에 섰다. 다만 사법부가 일관적이지 않은 판결들을 내놓으면서 논란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은 상황이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건과 관련한 국민연금의 책임자인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홍완선 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은 1심과 2심에서 모두 유죄 판결(징역 2년 6개월)을 받았다. 국민연금이 삼성물산 합병에 찬성표를 던짐으로서 이재용 부회장이 부당한 이득을 취했고, 삼성물산에 투자한 주주들과 국민연금은 손해를 봤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항소심에서는 국민연금의 찬성표 행사에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다는 내용까지 인정됐다.

반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우 집행유예 판결을 받은 2심에서 ‘경영권 승계를 위한 묵시적 청탁’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 또한 4월 초 열린 1심 재판에서 징역 24년의 중형을 선고받았지만 삼성의 부정청탁과 관련한 부분에 대해서만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엘리엇과의 법적다툼이 본격화되더라도 적폐청산을 기치로 내건 현 정부가 이 판례를 얼마나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 금감원의 삼성바이오로직스 조사가 불러올 파장은

한편 최근 불거진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분식회계 의혹은 이번 ISDS의 또 다른 변수로 떠올랐다. 합병 당시 제일모직이 삼성바이오로직스 지분의 46.3%를 소유한 대주주였으며, 삼성바이오로직스의 가치를 과대평가한 것이 불공정한 합병비율에 영향을 줬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당 심상정 의원이 2일 금융감독원의 삼성바이오로직스 조사 결정을 지지하며 ‘금융시장의 정경유착과 불공정거래 근절’을 이유로 든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금융감독원은 3일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분식회계 의혹에 대한 금융감독원의 특별감리는 엘리엇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입장을 밝혔다. 다만 감리 결과가 어떤 식으로든 ‘엘리엇 사태’에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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