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북한전문기자.

롤러코스터를 탄 듯 한반도와 주변정세가 출렁이고 있다. 북미 정상회담 일정이 취소될 운명을 맞았다가 기사회생하고, 판문점에서 주말 극비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는 상황까지 연출됐다. 북한과 미국이 판문점을 무대로 협상을 벌이는 국면까지 치달으면서 남북한과 북미관계는 물론 관련국 간의 치열한 신경전과 세력다툼이 전개되고 있는 양상이다. 

이 과정에서 북한의 비핵화, 즉 핵 포기 문제는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공언한대로 ‘한반도의 비핵화’를 위해 북한이 어떤 조치를 진정성 있게 취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북관계는 물론 북미 관계정상화와 한반도 정세를 판가름할 것이란 점에서다.
 
이 같은 측면에서 볼 때 트럼프 대통령의 ‘북미 정상회담 부적절’ 입장표명까지 낳은 북한 대미라인의 워싱턴 때리기는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북한 김정은 체제의 대미 외교를 담당하는 고위인사들의 구태의연한 전술이 트럼프식 협상술에 꼬리는 내리는 형국을 보임으로써 한계를 드러냈다는 분석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앞으로 북미 간의 협상 및 정상회담 뿐 아니라, 이후 평양과 워싱턴 사이의 관계 설정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란 전망도 제기되고 있다.
 
한때 회담 취소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당초 합의했던 ‘6월 12일 싱가포르 개최’로 복원되는 과정에서 북한은 전례 없는 시련과 굴욕에 가까운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지난 24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당신을 만나길 매우 고대했지만, 최근 당신들의 발언들에 나타난 극도의 분노와 공개적 적대감으로 인해 애석하게도 지금 시점에서 회담하는 건 부적절하다고 느낀다”고 밝혔다.

여기서 ‘당신들의 발언’이라고 트럼프 대통령이 지목한 건 바로 북한 외무성이 잇달아 내놓은 북미 정상회담 관련 대미 비난을 말한다. 대미통이라고 할 수 있는 외무성의 고위 간부들은 관영 조선중앙통신을 통한 담화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고위 관료들이 북미 정상회담과 관련해 부적절한 발언을 하고 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북한의 대미 비난 담화는 북미 정상회담 장소로 싱가포르가 낙점되고, 실무준비가 한창 탄력을 받던 상황에서 나왔다. 포문을 연건 베테랑 미국통인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 그는 지난 16일 담화에서 “조미 수뇌회담을 앞둔 지금 미국에서 대화 상대방을 심히 자극하는 망발들이 마구 튀어나오고 있는 건 극히 온당치 못한 처사”라고 주장했다. 당시 워싱턴에서는 존 볼튼 백악관 안보보좌관 등을 중심으로 북한 비핵화와 관련한 여러 구상이 쏟아졌다. 특히 리비아식 핵 포기 방식이 거론되면서, 북핵을 미국 테네시주 핵 폐기소인 오크릿지에 이관하자는 구체적인 방안까지 제기됐다.

북한이 이런 불편한 국면에 유감을 밝히고 자신들의 입장을 제기하는 건 북미 대화를 앞둔 상황이란 점을 감안해도 크게 무리라고 보긴 어렵다. 미국이 북한의 반발을 촉발시켰다는 일부 주장도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김 제1부상이 위험수위를 한참 넘기는 무리수를 둔 게 화근이 됐다. 그는 담화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겨냥해 “역대 대통령들보다 더 무참하게 실패한 대통령으로 남게 될 것”이라며 “다가오는 조미 수뇌회담에 응하겠는가를 재고려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파기를 압박하기도 했다.

백악관과 미 행정부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지만, 표면적으로 사태를 악화시키는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그런데 24일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으로 최선희가 후속 담화를 내면서 사태는 나빠졌다. 최선희는 볼튼 보좌관과 함께 마크 펜스 부통령까지 비난하며 “미국이 지금까지 체험해보지 못했고 상상도 하지 못한 끔찍한 비극을 맛보게 할 수 있다”고 위협했다. 최선희 부상은 더욱이 “저들이 먼저 대화를 청탁하고도 마치 우리가 마주앉자고 청한 듯이 여론을 오도하고 있다”며 사실과 동떨어진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결국 최선희의 담화가 나온 지 14시간 만에 트럼프 대통령은 북미 정상회담 무산을 김정은에게 알리는 편지를 언론에 공개해버렸다.

결과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의 판까지 걷어버리겠다는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하면서, 북한 당국과 김정은 위원장이 고대하던 미국과의 역사적 담판이 무산되는 위기까지 치닫자 평양 당국은 비상이 걸렸다.

이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트럼프의 ‘정상회담 무산’ 발표에 대해 김계관이 내놓은 담화는 이전 것과 분위기가 확 달랐다. 김계관은 ‘수뇌상봉 준비사업이 마감단계’라거나 ‘기정사실화됐던 수뇌상봉’이란 표현으로 무산에 깊은 아쉬움을 드러냈다. “만나면 관계가 좋아지면 좋아졌지 더 나빠지기야 하겠느냐”며 노골적인 구애의 모습도 보였다. 북한의 대미 외교사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쉽지 않다.
 
김정은 위원장이 지난 5개월간 공들인 북미 정상회담은 먹구름 속에 휩싸였고, 다시 일정을 잡기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까지 제기되는 위기에 처했다. 이런 국면은 평양 권력 내부에 상당한 충격파로 전해졌을 것이란 관측이다. 새로운 시대 흐름을 외면한 외무성의 ‘담화 공세’로 상황은 꼬였고, 이에 실망한 김정은 위원장이 김계관과 외무성 미국통을 불신할 가능성까지 제기될 정도였다.

북한으로선 다행스럽게도 트럼프 대통령은 “따뜻하고 생산적인 담화를 받은 건 매우 좋은 뉴스”라며 김계관의 자세를 낮춘 담화에 누그러진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는 6월 12일 예정대로 회담이 열릴 것이란 점을 강조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사이의 정상회담이 지난 26일 판문점 북측 평화의 집에서 열렸다. 또 같은 장소에서 북미 정상회담을 위한 실무접촉이 이어지는 상황이 포착되기도 했다.

자칫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식이 돼버릴 번한 북미 정상회담에 임하는 북한으로선 상당히 수세적 국면에 처하게 됐다. 트럼프의 협상술에 북한의 대미 외교라인은 물론 김정은도 뜻밖의 일격을 당한 국면에서 협상 테이블에 앉아야 한다는 점에서다. 트럼프를 향해 “늙다리 미치광이”로 비방하고 “아둔한 얼뜨기”(마이크 펜스 부통령), “인간 쓰레기”(존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 등의 격렬한 비난 표현까지 동원했던 북한 관영 선전매체들도 꼬리를 내리고 있다. 트럼프의 노련한 협상 전초전에 북한의 단골 메뉴인 벼랑 끝 전술도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트럼프는 자신의 책 「거래의 기술」에서 “나는 거래를 통해 인생의 재미를 느낀다. 거래는 내게 하나의 예술”이라고 말했다. 평양 당국은 아직 트럼프 협상술의 깊이를 재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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