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20 15:58 (토)
[이영종 ‘평양에선 지금’] 화장품 고급화에 공들이는 김정은 위원장
[이영종 ‘평양에선 지금’] 화장품 고급화에 공들이는 김정은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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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7.31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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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폭염 속 북방지역 통치행보를 마무리했다. 중국 단둥시와 마주한 북한 신의주 지역을 시작으로 양강도 삼지연, 함북 청진, 강원도 원산을 잇는 일정을 통해 그는 공장과 기업소·협동농장은 물론 군부대와 지역 시설들을 둘러봤다. 북한이 최고지도자의 현장방문을 지칭하는 이른바 ‘현지지도’ 스케줄이다.

김정은 위원장의 이런 움직임은 지난 6월 말 시작됐다. 같은 달 12일 싱가포르 멘토사 섬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김정은은 곧바로 베이징으로 달려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만났다. 6월 19~20일 이틀 간 진행된 올 들어 세 번째 북중 정상회담 자리에서는 북미 정상회담 이후 한반도 정세와 밀도 높은 북중관계의 유지 강화 방안이 논의된 것으로 알려졌다.

눈길을 끄는 건 김정은이 현장을 방문해 화를 내거나 지배인이나 관리인 등 실무 책임자들을 닦달하는 일이 유난히 잦았다는 점이다.

신의주화학섬유공장을 방문한 자리에선 “마구간 같은 곳에 현대식 기계를 들여놓았다”는 험한 말로 관계자들을 거칠게 몰아세웠다. “숱한 단위들에 나가보았지만 이런 일꾼들은 처음 본다”는 강도 높은 비판도 제기했다. 이 정도 수위라면 해당 간부들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다. 함경북도 어랑군에 짓고 있는 어랑천발전소 현장을 찾아간 그는 “도대체 발전소 건설을 하자는 사람들인지 말자는 사람들인지 모르겠다”고 격노했다. 북한 관영 매체들이 이런 분위기를 그대로 보도할 정도면 상황은 매우 심각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김정은이 시종 밝은 표정으로 공장을 둘러보고 전폭적인 지원을 언급하는 등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한 곳이 잇다. 바로 신의주화장품공장이다. 이곳은 김일성 주석이 1949년 설립을 지시한 북한 최초의 화장품 생산 시설이다. 북한 최대 규모의 화장품공장이며 ‘봄향기’라는 브랜드로 여성들에게 알려져 있다. 북한 매체들에 따르면 김정은 위원장은 신의주화장품공장 관계자들에게 “이미 거둔 성과에 만족하지 말고 더 높은 목표를 향하여 계속 비약해야 한다”고 말했다. “평양 시내에 ‘봄향기’ 화장품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상점을 내도록 해주겠다”는 약속을 하기도 했다.

가시 돋친 발언과 찌푸린 미간을 드러낸 다른 공장과 판이한 이런 상황은 이미 사전에 예정돼있었던 듯하다. 부인 이설주를 신의주화장품공장 방문에 동행한 것만 봐도 이를 엿볼 수 있다.

사실 김정은의 화장품에 대한 각별한 관심은 집권 초반부터 이어졌다. 북한 내 양대 생산시설인 신의주화장품공장과 평양화장품공장을 방문한 건 물론이고 평양 시내 쇼핑몰의 화장품 판매 코너에도 들렸다. 집권 이듬해인 2013년에는 부인 이설주와 함께 평양 해당화관 쇼핑몰을 둘러보는 장면이 북한 TV에 공개됐는데, 한국 브랜드인 ‘라네즈’ 간판이 포착돼 주목받기도 했다.

2015년 2월 평양화장품공장을 찾은 김정은 위원장은 “외국산 마스카라는 물에 들어가도 유지되는데 우리 제품은 하품만 해도 너구리 눈이 된다”고 질타했다. 이런 발언 내용이 북한 매체를 통해 외부에 알려지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눈 화장 제품에 방수 효과가 부족해 눈가로 검게 번지는 현상을 지적한 것이다. 제품을 써본 여성으로부터 조언을 듣거나 세심하게 챙기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내용들이다.

이 때문에 김정은이 화장품 품질 등과 관련해 구체적인 개선방안 등을 언급할 수 있는 건 부인 이설주와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의 조언이 있어서라는 관측도 나온다. 낙후된 화장품 생산 시설과 떨어지는 품질과 관련한 여성들의 불만을 있는 그대로 김정은 위원장에게 직언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란 얘기다.
 
김정은 위원장은 한 발 더 나아가 외국의 유명 브랜드에 뒤지지 않는 품질의 화장품을 생산하라며 채찍질을 가하고 있다. 공개 연설 등을 통해 경공업 제품 질 향상과 함께 외국산을 선호하는 ‘수입병(病)’ 타파를 강조한 김정은이 화장품을 시범 분야로 삼은 듯한 분위기다. 세계 정상급 화장품 브랜드인 랑콤과 샤넬·시세이도 등을 구체적으로 거론해가면서 북한 화장품의 품질향상을 강조한 일도 있다. 2015년 2월 평양화장품공장 방문 때는 “은하수 화장품 인기가 괜찮은데 여기에 만족 말고 세계적으로 이름난 제품과 당당히 경쟁할 수 있도록 투쟁하라”고 주문했다.

실제로 김정은 집권 이후 화장품 생산 분야에서 품질향상과 함께 용기 디자인과 포장 등에서 눈에 띄는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는 평가다. 선두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신의주화장품공장은 ‘봄향기’ 상표를 내세워 스킨·로션은 물론 노화방지를 의미하는 안티에이징 제품과 향수·립스틱 등으로 품목을 넓혀가고 있다. 눈길을 끄는 건 북한이 최근 내놓은 ‘분 크림’이라 부르는 화장품이다. 해외 판매까지 겨냥해 은 포장에 영문으로 ‘BB크림’이란 표기까지 해놓은 이 제품은 몇 해 전부터 한국 등을 중심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제품의 북한판이다.

화장품은 과거 북한 여성의 삶과 일정한 거리가 있었다. 사회주의를 표방한 체제 특성상 화려한 색조 화장은 물론 일상적 피부 가꾸기도 사치로 여겨져 온 분위기가 팽배했던 것이다. 하지만 김정은 체제 들어 주목되는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게 사실이다. 북한 여성들의 패션·헤어스타일 유행을 만들어 내는 이설주·김여정의 등장과 신흥 부유층인 ‘돈주(錢主)’ 세력의 구매력, 그리고 사회적 개방 풍조 확산에 힘입어 벌어지는 현상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북중 변경지역에 머물며 잇달아 공장·기업소를 찾아 생산을 독려한 건 경공업 분야를 중심으로 민생을 챙기는 모습을 보여주려 한 것으로 판단된다. 화장품 공장을 찾아 생산 정상화와 세계적 수준의 품질 추구를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김정은 위원장의 뜻이 정말 화장품 고급화에 있다면 굳이 어려운 길을 갈 필요가 없다. 아시아와 세계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한국의 화장품과 화장 문화를 의미하는 ‘케이(K)-뷰티’와 힘을 합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비핵화’ 합의에 대한 북한 최고지도자의 이행과 남북 협력의 결단만으로 함께할 수 있는 길이다. 아름다워지고 싶은 여성의 욕망을 막을 힘은 그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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